짠짠이의 패턴이 슬슬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우리의 삶의 질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눈코 뜰 새 없고 토막잠에 시달리는 삶이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살만하다 싶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약간 숨통을 돌리고 나니 슬슬 올라오는 생각.
놀러 나가고 싶다
그렇다. 매년 국내외로 여행을 다니고 주말마다 아내에게 산책시켜 달라고 조르는(...) 나로서는 숨 좀 쉬게 되니 놀러 가고 싶은 생각이 가득했다. 게다가 처자식과 함께 동네 마트만 가도 신나는데 여행을 가면 얼마나 재밌겠어! 마침 이 즈음 친구의 아기 동반 여행기를 들었는데, 첫 아이 8개월 때 독일 1개월 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듣고 나니 왠지 모를 희망이 생기면서 여행 욕구가 폭발했다. 그렇다고 당장에 해외여행을 계획할 수는 없고 한 단계씩 멀리 나가보면 어떨까 싶었다.
1. 차로 2시간 거리 국내 여행
2. 양가(차로 4시간 거리) 방문
3. 제주도 여행
4. 비행시간 4시간 이내 해외여행
5. 환승 포함한 장거리 해외여행
지금 써놓고 나니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당시에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여행 욕심이 폭발할 시기라 저런 생각을 했다. 짠짠이가 걷기 전에 유럽 또는 미국에 사는 친구네 집에 가서 휴가를 보내는 게 최종 목표(...).
너무 황당하면 말문이 막힌다고 했던가. 아내는 반쯤 포기한 기색으로 "그래 어디 한 번 해봐라" 식으로 일단 완전히 반대하지는 않기로 했다. 육아로 집에 갇혀 있는 아내로서는 어처구니없는 계획이지만 실현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은 듯. 그래서 이 원대한 계획의 첫 발걸음으로 100일을 갓 지난 시점에 국내 여행을 가기로 했다. 장소는 춘천! 거리도 적당하고 먹거리 놀거리 구경거리도 충분하고 가본 지도 오래되었고, 결정적으로 우리가 활동했던 합창단이 춘천합창대회에 나간다고 해서 구경을 가고 싶었다. 마침 뜻이 맞는 합창단 선배 가족이 있어 각자 4개월 아들, 4세 딸을 동반하고 같이 여행을 가기로. 아싸 신난다!
무작정 신난 나와는 달리 아내는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나 걱정했다. 외박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아들을 데리고 가려니 뭘 어디까지 챙겨가야 하나, 생활 패턴 잡아가는 거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남편은 대책이 있는 걸까(...). 춘천으로 1박 2일, 둘이서 라면 준비할 게 별로 없을 간단한 여행이다. 극단적인 상황이지만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는다고 해도 적당히 여행을 즐기고 마칠 수 있다. 우선 꼭 필요한 물건이 많지 않고 숙소든 식사든 뭐든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결정해도 된다. 하지만 아기를 데려가려면 최대한의 준비로 변수를 최소화하는 게 필요하다. 짠짠이의 생활패턴을 고려한 여행 조건은 이렇다.
1. 1.5시간마다 기저귀를 갈고 4시간마다 수유를 한다.
2. 수면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차로 이동한다.
3. 저녁 8시에 밤잠을 자고 새벽에 2~3회 깬다.
4. 씻기고 닦고 갈아입히고 놀아줄 물품이 항시 필요하다.
이런 조건 하에서는 외부활동을 하기가 어렵다. 특히 저녁시간에는 꼼짝없이 숙소에서 아기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춘천 교외의 경치 좋은 숙소가 아닌 시내에 위치한 크고 시설 좋은 숙소로 결정했다. 대략의 일정은 이렇게.
1일 차
- 오전에 춘천으로 이동
- 점심은 수유실이 있는 닭갈비집
- 닭갈비집 근처 카페 구경
- 합창대회 구경
- 늦은 오후에 숙소 체크인
- 저녁은 숙소 근처에서 구입/배달
- 짠짠이가 밤잠에 들어가면 본격적인 음주(...)
2일 차
- 아점은 마트/편의점 간편식
- 경치 좋은 카페 구경
- 오후에 귀가
특별할 것은 없는 여행 일정이지만 아들과 처음으로 외박을 한다니 신나고 설렜다. 다만 첫 여행이라고 혹시나 싶은 물건도 챙기다 보니 차에 짐이 꽉 차게 되었다. 심지어 스토케 유모차까지 분해해서 싣고 갔으니(...). 지나고 보니 전혀 필요 없는 물건도 있었지만 가져가길 다행이다 싶은 것도 있었고 뭐 이렇게 부모로서 레벨업을 해나가는 거 아니겠는가. 꽉 채운 짐으로 차는 무겁지만 들뜬 마음을 안고 출발!
목적지인 춘천까지 가는 길은 순조로웠다. 아들이 차에서 자기도 했고 적당한 시간에 휴게소에서 수유도 하니 불안요소가 사라져서 맘 편히 이동할 수 있었다. 차로 이동할 때 수유와 기저귀를 해야 할 상황이 꼭 발생하는데 언제 어느 휴게소에 들어가느냐가 관건이다. 기저귀나 수유 타이밍이더라도 아들이 자고 있으면 좀 더 가자고 휴게소를 지나쳐서 다음으로 향하는데 그러고 곧장 깨면 낭패(...). 반면에 이 타이밍이 찰떡같이 맞아떨어지면 그게 뭐라고 기분이 좋고 상쾌하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게 휴게소 수유실 시설이 훌륭하면 괜히 복권 맞은 기분. 우리나라처럼 훌륭한 고속도로 휴게소가 30~50km마다 있지 않으면 어떻게 여행을 했을까 싶다.
첫 목적지는 숯불 닭갈비 식당. 한동안 못 먹은 불에 구워 먹는 고기 도전! 이런 갓난쟁이를 데려가도 괜찮을까 걱정되긴 했지만 수유실도 있고 선배네 가족도 있으니 괜찮을 거야 싶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식당 환경은 나쁘지 않았고 점원들도 잘 도와줬고 닭갈비도 맛있었고 무엇보다도 선배네가 우리를 많이 배려해줘서 큰 탈 없이 식사를 마무리했는데, 아내가 주변에 폐 끼치는 느낌 때문에 불편해했다. 나는 좀 뻔뻔한 성격이라 좋게좋게만 생각했는데 이런 부분은 아내와 정말 다른 점이다. 그리고 이런 차이 때문에 나는 별생각 없고 아내만 혼자 속이 타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점심을 맛나게 먹고 근처 카페에 가서 야외 좌석에 자리를 잡고 처자식과 함께 누운 듯 앉아있으니 여행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이 카페가 예전에 아들이 생기기 전에 와본 곳이라 셋이서 오니 더 느낌이 각별했다. 조금 다른 모습이긴 하지만 아내와 둘이서 했던 것을 아들과 같이 셋이서 하는 게 신기하고 재밌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아내와 연애하면서 다녔던 곳들을 따라서 셋이 다녀봐도 좋겠다.
합창대회 구경도 비슷한 맥락이다. 아내와 친구들과 같이 했던 거를 아들과 함께 따라가기. 나와 아내 모두 합창단에서 합창대회에 출전하고 수상한 경험이 있어서 그걸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더군다나 아들까지 함께! 이번 기회에 아들에게 많은 삼촌 이모들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이전에 합창대회 출전했을 때도 선배들이 아이를 데리고 응원을 와줬다. 그땐 멋지다 대단하다 그런 정도만 생각했는데 직접 겪어보니 어떤 마음인지 조금 알 거 같다. 아이 때문에 합창단을 더 하지는 못하지만 아이와 함께 간접적으로나마 합창단을 즐기고 싶었던 거 아닐까. 아이가 생기기 전에 즐겼던 모든 취미활동에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이번에도 우리 합창단은 큰 상을 탔고 다들 신나서 뒤풀이를 하러 갔다. 아 예전에는 저런 자리에 절대 빠지지 않았었지. 그렇게 신나게 놀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젠 비슷한 처지의 선배네 가족과 우리끼리 소소한 뒤풀이를 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수상의 여운을 만끽하고 숙소로 체크인. 숙소에 짐을 풀고 간단히 장도 보고 아이들이랑 놀아주다 보니 어느새 저녁시간이다. 숙소가 시내에 위치한 덕에 근처 맛집에서 쉽게 저녁거리를 준비해서 여행 만찬 시작! 하기 전에 먼저 아들을 재워야 했다. 선배네 아이는 4세라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지만 이제 갓 100일 넘은 우리 아들은 무리다. 어쩔 수 없이 아내는 아들을 재우고 나서 다시 합류한 저녁 8시부터 본격적인 여행의 밤이 시작!
예전에 친구들이랑 놀러 가서 그런 얘길 했다. 우리가 평소에도 술집에서 술 먹고 여행 와도 어차피 술 먹는 건 마찬가진데 왜 여기까지 와서 술을 먹지? 답은 간단했다. 똑같은 술을 마셔도 나와서 마시면 더 신나고 많이 먹을 수 있고 집에 갈 걱정도 없잖아! 아기와 함께하는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는 낮에 열심히 아들 수발들고 놀아주다가 아들 재우고 나서 술 먹고 노는 모습이 이번 여행에서도 다를 건 없었다. 하지만 낮에 바깥 구경도 하고 집이 아닌 곳에서 대리운전이나 귀가 걱정 없이 맘껏 놀고먹는 것만으로도 신나고 즐거웠다. 여행이 별건가 뻔한 거라도 좀 다른 데서 해보는 게 여행이지. 그래서 오래간만에 숙취가 있도록 마셨다(...).
아기를 데리고 가는 여행의 문제는 나의 즐거움은 큰데 아내의 즐거움은 그 정도로 크지 않다는 것이다. 수유와 재우기는 아내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보니 노는 데 집중하기 어려웠다. 실은 꽤 힘들었다고. 새벽 수유를 해야 하니 술을 먹을 수도 없고 아기가 깨면 가서 재워야 하니 토막잠은 마찬가지다. 선배네 애나 우리 아들이나 엄마만 찾는 편이라 엄마들은 좀 힘들고 아빠들만 신나게 놀게 되었다. 그러므로 평소에 좀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읍니다(...).
오전에 숙소 체크아웃하고 마지막 코스로 넓은 풀밭과 강변 뷰가 있는 카페로 갔다. 역시 뛰어다닐 공간이 있는 곳은 아이 동반 가족들의 천국. 여기저기 아이를 데려온 가족들로 가득했다. 예전에는 여행을 가면 꼭 커플들만 보이더니 이젠 마찬가지로 애 딸린 가족들이 많다. 그러고 보면 사람 사는 게 비슷하구나 싶어서 살짝 김이 새면서도 어쩐지 마음이 편해진다. 우리도 남들 다 가는 카페 풀밭에서 햇빛도 쬐고 사진도 찍고 뒹굴거리다가 집으로 향했다.
이번 여행이 좋았다는 건 동일하지만, 나는 여행이 할만하다고 생각한 반면, 아내는 생각보다 힘들었다고 하여 앞으로의 여행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게 되었다. 과연 우리는 5단계 여행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