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빚을 갚고 있는 게 아니다. 내 자존감을 세우는 중이다.
3억 빚을 졌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경험 중의 하나는 바로 3억이라는 돈의 크기가 아니었다.
나와 함께 돈을 투자했던 동네언니. 그녀는 나를 참 좋아했다. 나의 넘치는 에너지도 좋아했다. 하지만 그 언니와 관계가 돌아서게 된 계기도 ' 돈' 때문이었다. 아니 그 돈 때문에 내가 돌아섰다.
엄연히 따지자면 그 돈도 아니다. 자존심도 아니다. 아마 상처받은 내 자존감 때문이 맞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 자존감을 잃어버리면 버틸 수 있는 힘이 없다.
나보다 10살이 많았던 그녀는 함께 투자를 하고 싶다고 했다. 다른 가게 사장님이었던 그녀는 여윳돈을 주었고 나는 대신 이자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그 돈을 받았다. 그리고 작은아버지네 부동산 투자에 투자금을 건넸다.
사기를 당한 날, 나는 그녀에게 말을 했다. 어찌 보면 그녀가 그 부동산에 투자한 것이지만 나와 연관이 있었고 나로 인한 것이기에 내가 갚는다고 했다. 시간이 조금 걸려도 좀 기다려달라고 했다. 월마다 상환을 하겠다고 했다. 몇 개월 동안 이자로만 500만 원을 받았던 그녀는 며칠 뒤 내게 만나자고 했다. 커피숍이었다.
A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덩치가 매우 큰 그녀의 남자친구를 함께 데려왔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죄인처럼 앉아있었다.
A의 남자친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갚을 건데? 5천만 원?"
그녀는 팔짱을 끼고 소파에 기대며 아무 말이 없다.
"네? 지금 3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버티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줘요"
"그게 가능해? 되겠어? "
김밥집도 오픈했고 어떻게든 갚을 거라고 했다. 월 300씩 갚으면서 매달 상환하겠다고 그녀에게 말했는데 나를 만나자고 하곤 A는 남자친구를 왜 그 자리에 데려왔을까? 그리고 이 상황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혼자오기가 뻘쭘해서 그런 것일까?
그러면 같이 오겠다고 귀띔이라도 하지. 아니면 빚을 어떻게 갚느냐는 말을 A가 아닌 그녀의 남자친구에게서 듣는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니면 압박인가? 안 갚으면 가만 안 두겠다는?
A가 아닌 그녀의 남자친구로부터 이 소리를 듣는다는 게 수치스러웠다. 무서웠냐? 전혀 아니었다. 비참했다. 나를 이렇게까지 못 믿으면서 돈은 어떻게 투자한 걸까? 이 상황이 너무 싫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각서를 써줬다. 1년 안에 갚는다는 각서다. 못 갚을 시에 김밥가게를 넘긴다는 조건이다. 그리고 사인을 했다.
그렇게 커피숍을 나오면서 나는 눈물을 쏟아냈다.
'강주영. 진짜 바닥이 안 보이는구나'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돈 최단시간에 갚는다.
첫째 둘째 달 300만 원, 400만 원, 500만 원 마지막에 600만 원씩 갚았다. 김밥집, 주점 아르바이트, 주말마다 목욕탕 때밀이, 남의 집 설거지를 하면서 번 돈이다. 그나마 아이들이 어려서 다행이다. 이 아이들을 엄마가 봐줄 수 있어서 그나마 미친 듯이 일을 할 수 있었다. 1년 동안 2~3시간 밖에 안 잤다. 그녀는 가끔 내게 연락했다. 중간중간 돈이 어디서 나냐고 물었다.
" 내가 말했잖아요. 어떻게든 빚 다 갚는다고"
그녀에게 빌린 돈 5천만 원의 빚 액수가 무서운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4000, 3000,1000만 원....... 그렇게 8개월 차 , 나머지 600만 원을 그녀의 계좌에 밀어 넣고 나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지웠다. 그리고 뭉개졌던 자존감으로 썼던 각서를 찢었다. 다른 번호로 A의 전화가 왔다. 왜 내 전화 안 받냐고? 나는 그냥 바빠서 잘 살고 있다고 했다.
"연락이 안 되어서"
그녀는 전화가 안 되는 가게에 찾아왔다. 빚을 다 갚았으니 다시 연을 이어가고 싶었나 보다. 나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A는 내가 예전처럼 왜 살갑지 않은지 궁금해했다. 왜 돌아섰는지 영문을 모르겠다고 한다. 그녀는 여전히 내가 돈이 어디서 나서 그렇게 빠르게 갚았는지가 궁금한 모양이다.
독기품은 돈, 그렇게 갚아나갔다. 김밥집의 매출도 서서히 올라갔다. 3500원짜리 김밥 팔아서 얼마나 버냐고 그랬다.하지만 나는 적으면 적은대로 많으면 많은대로 조금씩 빚을 갚아나갔다. 처음엔 까마득했던 숫자가 한 달에 600만원씩 갚아나가니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줄어드는 빚의 숫자만큼 내 희망은 점점 커졌다.
3억 빚을 지는 동안 가장 힘든 것은, 자존심이 아니다. 희망이 안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관계도 아니었다. 사람관계도 신뢰와 상처를 주지 않으면 회복이 된다. 하지만 내 삶의 원동력이었던 바닥이 보이지 않게 떨어지던 상처받은 내 자존감을 다시 세우는데는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