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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루 Oct 03. 2023

아사쿠사 벤또。

아~ 살짝 성황당 같은 분위기


스피커에서는 도쿄 아사쿠사에 있는 스타벅스 ASMR.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비록 믹스커피를 마시고 있지만, 저는 포근한 가을 아침 햇살이 카페의 큰 창으로 들어오는 것을 연상하며 상큼하면서도 여유로운 하루를 시작합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마치 고무줄처럼 내가 원하는 만큼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는 마법 같은 시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느긋함.


그런데 오픈 30분 전 이 평화로움을 깨며 도시락 파우치를 든 젊은 어머니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옵니다. “아저씨, 우리 딸 도시락 즘…” 숨소리에서, 표정에서, 이미 내밀고 있는 도시락 가방에서 제가 유일한 희망이라 것을 직감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의 도시락과 비교해서도 부족함이 없는 정성스러운 엄마표 도시락이 필요하다는 것. 혼자서 해보려 했지만 뜻한 대로 되지 않았을 거라는 것. 어쩜 여기에 오기 전에 다른 곳에서 거절당했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진짜 시간이 없다는 것을 어머니의 간절하면서도 거절할 수 없는 예의 바른 부탁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노련하면서도 여유가 느껴지는 표정으로 우선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려요. 사실은 최근 일본 도시락 싸기 연습에 매진해 왔었고 이 분은 정말 운이 좋게 제대로 찾아오신 겁니다. 곧 아시게 되겠죠. 일본 도시락은 소박한 가운데, 들판에 무심히 피어난 듯한 꽃처럼 적절한 포인트를 가미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기자기한 것만 같지만 먹다 보면 마치 코스요리를 먹는 것처럼 만든 이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져야 하죠. 특히 어쩔 수 없이 식은 음식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느끼할 수 있는 음식에는 찰떡의 소스가 반드시 들어가야 하고요. 이렇게 제대로 하려면 쉽지 않아요. 그래서 어쩌면 백화점에서 도시락을 사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p/BTnyqGTgDWJ/?igshid=MzRlODBiNWFlZA==


제가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왔네요. 때마침 밥솥에서는 마지막 김을 뿜어내고 있고, 튀김기와 해면기는 끓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께는 구수한 둥굴레차 한 잔을 건네 드렸습니다.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다시 한번 더 말씀드렸어요.


도시락 파우치를 열어 보니 층층이 3단으로 구성된 용기네요. 일반인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일상적으로 들고 다녀야 하는 도시락 용기는 아닙니다. 3단 구성이라는 것은 특별한 날에 사용되는 건데요. 즉, 밥과 반찬 그리고 디저트나 사이드까지 구성해야 하는 겁니다. 국물을 담을 수 있는 용기는 별도로 없으니 목 막힘이 없는 음식을 담아야겠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걸 잘 모르고 도시락을 싸다가 막상 먹는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데 용기가 원형이네요. 저는 네모난 걸로 연습을 했는데 큰 문제는 아니고 오히려 동그래서 더 이쁜 도시락이 될 거라고 저도 기대가 됩니다.


첫 번째 용기는 밀폐 뚜껑이 별도로 있네요. 카레소스만 담습니다. 네! 이 도시락은 카레 도시락입니다. 용기를 딱 봤을 때 저는 이미 계산이 되었어요. 담은 카레소스 위에 엣지 있게 오레가노를 살짝 뿌려요. 정말 살짝. 벌써 이 정도에서 지켜보던 어머니의 표정이 밝아집니다. 사실 쉽게 쉽게 하는 것 같지만,  불과 허브 가루를 뿌리는 것에도 초보와 저 같은 프로들은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경험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겁니다. 도시락을 열었을 때 밝아지는 아이의 표정과 탄성을 지르며 몰려들 다른 아이들을 생각하니 벌써 흐뭇합니다.


“아저씨 그런데… 그러면… 밥과 반찬은 나머지 두 개에 나눠 담나요?” 저는 갑자기 웃음이 빵 터졌습니다. 저를 오늘 처음 봐서 잘 모르시니까. 과소평가하실 수 있죠. 이해합니다. 그렇게 쉬운 선택을 할 거면 굳이 제가 나설 이유가 없잖아요. 어머니는 다시 잠잠해져 지켜보세요.


두 번째 용기에 밥을 퍼서 조금 꽉 찬 초승달 모양으로 밥을 반만 담습니다. 밥의 온기가 위칸의 카레가 식지 않게 하는 보온 효과를 노린 겁니다. 저는 이제 이 정도는 본능적으로 계산이 됩니다. 오랜 수련의 결과이죠. 어머니께서 아하~하는 표정을 지으며 무릎을 치세요. 밥의 양은 이 정도면 어린 딸이 먹기에 충분합니다. 이제 나머지 공간에 반찬들을 순서대로 채워 나가면 완성됩니다. 소시지는 문어 모양으로 칼집을 낸 후 살짝 볶아서, 그리고 반숙 계란과, 꽃 모양의 당근, 세 가지 색상의 어묵꼬치를 올립니다. 그런데 그동안 연습해 왔던 용기의 모양과 크기가 달라서인지 조금 횡~한 느낌.


밥만 남기고 반찬을 다시 꺼내요. 이번에는 문어 모양의 소시지, 반숙 계란, 당근, 어묵을 두 배로 채워 넣습니다. 어머니는 시간을 자꾸 확인하시지만 저는 멈추지 못하고 조물조물, 신들린 토핑과 플레이팅이 계속되고, 그래도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 마카롱 가게의 화분에서 보랏빛 방울꽃과 잎사귀를 몰래 따와서는 깔고 올리고 더해요. 그런데도 왜 이렇게 계속 허전해 보일까요? 그래서 노란 단무지와, 빨간 초생강도 군데군데 채우는데…


아~ 살짝 성황당 같은 분위기. 저는 이미 과몰입 상태.


https://getsmartreview.com/%D7%A7%D7%95%D7%A4%D7%A1%D7%90%D7%95%D7%AA-%D7%90%D7%95%D7%9B%D7%9C/


어머니는 ‘이게 맞는 건가?’ 하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뀌시고, 저는 조금 겸손해졌습니다.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에게 12척의 배가 남아 있었다면, 저에게는 하나의 도시락 용기가 남아 있습니다. 시간이 없을수록 돌아가라고 했던가요. 이번에는 직감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먼저 스케치를 해요. 사실 아이들 도시락의 하이라이트는 사이드와 디저트죠. 저는 이 마지막 용기에 모든 것을 쏟아 붓기로 했습니다. 전장에서 내 한쪽 팔이 잘려 나갔다 하더라도, 적장의 목을 베었다면 결국 저는 승자이니까요.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어머니가 저를 의심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요.


세 번째, 마지막 용기를 내려놓고 호흡을 가다듬어요. 미리 그려 놓은 그림대로 양배추를 얇게 썰어서 바닥에 풍성하게 깔아요. 수북이 쌓아야 그 위에 올라가는 음식이 더욱 푸짐해 보입니다. 그리고 고로케, 새우, 돈까스, 치킨가라아게를 튀겨서 올립니다. 네! 모둠 튀김입니다. 그런데 조금 전과는 다르게 색감의 구성이 소박하다 못해 단조롭습니다. 양배추와 튀김 색의 대비가 늪지의 갈대밭 같아요.


타르타르소스를 따로 담지 않고 튀김 위에 지그재그로 뿌리는 치트키를 써야 할 것 같아요. 실패할리 없죠. 시간이 지나면 튀김이 눅진해져 도시락에는 사용해서는 안 되는 방법이지만, 지금 그런 것까지 배려할 상황이 아닙니다. 하지만 훨씬 맛깔스럽게 보일 거예요. 이렇게 마무리하면 어머니도 불쑥 찾아와서 무턱대고 부탁하신 거 치고는 나쁘지 않다며 만족하실 겁니다. 소스통을 꺼내 튀김 위에 사선으로 뿌려 마무리하려는데 찍~ 찍~ 굳은 타르타르가 소스통 입구를 막고 있어서 새똥 싸듯이... 더 세게 힘을 줬더니 푸욱~ 하고 이번에는 아기 설사똥처럼 크게 쏟아집니다. 다시 튀김을 준비하는 데는 시간이 걸려요. 당황한 저는 키친타월로 쏟아진 타르타르를 어떻게든 걷어 내 보려는데 설상가상으로 튀김 전체에 소스를 발라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갈대밭에 서리가 내린 것처럼.


어머니는 ‘그거라도 제발 빨리’ 하는 표정. 그리고 ‘아~ 이미 아까 망한 거였구나’ 하는 떠름한 표정도. 저의 의기양양했던 기세와 허세는 이미 사라졌어요. 도무지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고 그렇다고 이대로 마무리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생파채를 가늘게 썰어 튀김 위에 올려 번진 소스를 최대한 가리는 것으로 도시락을 완성하였습니다. 도시락을 열었을 때, 다른 아이들은 제 껏 먹느라 정신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숨길 수 없는 미안한 기색으로 어머니께 도시락 파우치를 건네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절인 배춧잎처럼 풀이 죽어 있는 저에게 “괜찮아요. 고생하셨어요.”라며 애써 웃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가시다가 뒤돌아서 덤덤하게 “사장님 그런데 이 도시락 이름이 뭐예요?”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저는 아무렇게나 “아사쿠사 벤또”라고 대답했어요. 그런 도시락이 있는지도 아무도 모르고, 그래서 누구도 먹어 보지 못해서 평가나 검증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름.



도쿄 아사쿠사 스타벅스 백색 소음 들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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