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었던 저는 수줍어서 더 멀리 달렸답니다.
해가 저물면 거닐고 싶더니, 며칠은 새벽에 깨지도 않고 잘 잤다 싶더니 가을이었네요. 꿈에서 덜 깬 아이가 엄마의 품으로 연인이 서로의 품으로 파고들며 게을러집니다. 저는 홑이불을 감으며 다시 눈을 감아요. 아침 매미는 이제 저 멀리서 들리고. 잠결에 새벽 귀뚜라미가 우는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젯밤 산책을 나섰을 때,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흙과 풀에서 나던 가을 냄새가 흐릿하게 다시 퍼지는 것 같습니다.
봄은 교생선생님. 가을은 이뤄지지 않았던 첫사랑 같아요. 모두 짧고 아련합니다. 애틋한 추억은 계절처럼 지워지지 않고 이렇게 때가 되면 다시 떠올라요. 오늘도 나를 봐 달라고 소녀를 앞서 달리는 소년이 나타나겠지요? 어쩌면 오늘은 소녀가 소년의 이름을 불러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가을이니까. 소년이 여름내 몸살 나도록 자신을 앞질러 달렸던 걸 알고 있었으니까. 제발 소년이 멈춰서 뒤돌아봐야 할 텐데… 소년이었던 저는 수줍어서 더 멀리 달렸답니다.
떠나간 곳은 빈자리가 됩니다. 언젠가는 누군가가 불쑥 들어와 여행 가방을 툭~ 하니 내려놓을지도 몰라요. 마치 자기 자리를 아는 것처럼 말이죠. 늙은 의사가 말하는 희망가 같은 게 아니에요. 저를 믿어보세요. 당신이 이렇게 오랫동안 차를 끓이며 기다린 만큼이나 그는 긴 여행을 했을 겁니다. 그때는 불길한 의심 같은 건 하지 말고 용기를 내세요. 이제야 비로소 떠난 이들의 뒷모습도 아름다웠다 말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그는 따뜻한 미소와 함께 기다려줘서 고맙다며 손을 잡아 줄 겁니다. 차를 함께 나눠 마시며…
그래요! 오늘 저는 일부러 먼 길을 돌아서 출근을 해야겠습니다. 파스타 형님이 주시는 커피를 묽게 묽게 가을색으로 타야겠어요. 조명은 켜지 않고 양쪽 문을 활짝 열어 바람을 지나가게 해야겠어요. 노랫말 없는 음악을 틀어 놓고 느리게 느리게 번져오는 햇살을 들이며 유리컵을 닦아야겠습니다. 그리고 가을이 더 짙어져 쓸쓸해지기 전에, 오늘 이 글을 ‘가을에도’라고 시작되는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