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그렇게 방향 지시등을 켜자, 아! 하더니 유턴을 합니다
매주 목요일 오후는 뉴스보이 율이가 엄마와 함께 오는 날입니다. 평소에는 킥보드를 타고 뉴스만 전달하고는 사라지지만, 이날은 이곳에서 식사를 합니다. “아저씨 제 통장에 200만 원 있는데 드릴게요!” 엄마와 제가 경제 걱정, 나라 걱정 그래서 요즘 손님이 줄었다고 결국 내 걱정을 하고 있는데, 닌텐도 게임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끼어들어요. 율이는 엄마와 제가 나누는 대화뿐만 아니라, 다른 손님들 간의 대화도 다 듣고 있습니다. 몇 년 동안이나 엄마가 모아줬을 세뱃돈을 기꺼이 저에게 주겠다고 하네요. 엄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옆에서 가라아게를 먹고 있던 도균이도 절레절레. 저 옆에 있는 이섭이는 좀 전부터 자꾸만 엄마한테 어디쯤 왔냐고 계속 확인을 해요.
“아저씨도 혹시 허무주의자인가요?”
도균이가 많이 컸네요. 보시다시피 사춘기가 찾아왔어요. 올해부터 경계하는 눈빛과 두드러지게 느려진 행동 그리고 말투가 어눌해지고 부쩍 말수가 줄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과자가 가득 든 큰 가방을 메고 학원과 학원 사이에 있는 이곳에서 밥을 먹어요. 주말엔 영업을 하지 않으니 친구들과 여기서 단체 과제를 하기도 합니다. 내 눈에 아직도 초등학생 모습 그대로인데, 자신이 허무주의자 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중학생이 되었네요. 그런데 왜 저도 허무주의자 일수도 있다고 의심하는 걸까요? 혹시 나도 모르게 허무맹랑한 모습을 보였던 것일까? 스스로를 점검해 봅니다.
이런 심오한 질문을 아이들이 할 때는 대답을 잘해야 합니다. 적어도 제 의견이 궁금하다는 것은 저를 신뢰하는 어른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니까요. 제가 롤 모델이나 모범적인 길라잡이는 못 되더라도 최소한 올바른 방향 지시등의 역할은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말 한마디에 자신이 허무주의자라고 확신할 수도 있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 조카, 닭 껍질도 잘 먹네. 역시 치킨 맛을 제대로 아는구나!” 저는 그저 치킨 한 조각을 먹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외삼촌의 그 한마디에 저는 한동안 신나게 닭 껍질만 벗겨 먹었습니다. 외삼촌은 닭다리를 그렇게 좋아하셨어요. “엄마 5분 후에 도착한다고?” 이섭이가 유난히 오늘 엄마를 기다립니다.
저는 도균이에게 얼마 전 당근마켓에서 게임기를 팔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냐고 물어봤습니다. “저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걸 팔아서 용돈이 생겼으니까. 당연히 기분이 좋았죠!” 도균이의 대답이 다행히도 담백합니다. “그렇다면 아저씨가 볼 때 도균이는 실용주의자야!” 그리고 왜 비관적인 허무주의와 합리적인 실용주의가 양립할 수 없는지 부연 설명을 해줘요. 제가 그렇게 방향 지시등을 켜자, 도균이가 아! 하더니 유턴을 합니다. 잘 넘어간 것 같습니다. “저는요? 저는요?” 여전히 닌텐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율이가 자기도 하나 정해달라고 합니다. “율이는 가진 것도 나눌 줄 알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으니까 분명히 박애주의자가 될 거야!”
주차 중이라는 엄마의 문자까지 확인한 이섭이가 급하게 남은 가라아게를 먹어치우고 있습니다. “이섭아, 오늘 엄마랑 어디 가기로 했어?” “아니요 엄마가 와서 가라아게를 뺏어 먹으면 결국 싸우잖아요. 그래서 엄마가 오기 전에…” “아, 우리 이섭이는 평화주의자였구나” 이섭이는 알쏭달쏭, 도균이는 아하~, 율이는 그러든가 말든가…
※ 이섭이 어머니께 보낸 문자
어머니, 이섭이는 2019년 9월 23일부터 현재('22.12.7)까지 카레우동 65그릇 치킨가라아게 71 바구니. 그러니까 총 355조각을 해치웠습니다.
그 외에는 가마타마우동 9그릇, 돈고츠라멘 2그릇, 치킨카레라이스 4그릇밖에 먹지 않았으니, 확실히 면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매번 밥을 조금씩 주면 남은 카레에 비벼 먹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스프라이트는 총 19캔을 먹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탄산을 먹지 않습니다. 고등학생이 되더니 부쩍 자주 온다고 했더니 어머니께서 바빠지셔서라고 하더군요. 점점 주변을 살필 줄 아는 청년이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