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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어교사 김지씨 Dec 30. 2023

튀르키예와의 오랜 인연

오르한 파묵의 소설로 가는 길에 떠오른 아지즈 네신

대학원 이슬람 수업에서 이슬람과 관련된 주제 발표를 해야 한다기에 어떤 주제로 해야할까라는 고민을 하다가,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나마 조금 아는 게 문학 혹은 그 언저리 내용밖에 없어 결국 튀르키예의 소설가 오르한 파묵에 대해 발표를 하기로 했다. 첫 번째 대학원을 다닐 때 지도교수님이 그의 소설 <내 이름을 빨강>을 극찬하신 바 있어서 꼼꼼히 읽어본 적이 있었고, 한 10년 전인가 오르한 파묵이 노벨상을 받았을 때도 관심을 가지고 몇 편의 작품을 훑어본 바가 있어서 어느 정도 발표를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튀르키예와는 나름 오랜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 인연은 아주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집집마다 유행처럼 구비해두었던 위인전집이나 백과사전을 사기에 경제적 부담을 가지셨던 나의 부모님은 당시에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을 하셨는데, 그럴 듯한 출판사에서 나온 전집류를 구매하기 보다는 야시장 같은 데에 떨이로 나온 전집을 싼 가격에 구매하셨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야시장의 희한한 분위기를 기억하는데 책장도 아닌 바닥에 쫘악 깔려있는, 심지어 이것저것 인기많은 위인들이 빠진 위인전집을 싼 가격에 후려쳐서 구매하셨고, 아무래도 동화같은 것이 많을 것이라는 이유로 아무도 구매하지 않았던 소파 방정환의 전집 또한 1+1 개념을 함께 싸게 구매하셨다. (방정환 전집은 나중에 아동문학을 전공하셨던 선배의 군침을 삼키게 만들었으나, 그때는 이미 어머니께서 재빠르게 몇 가지 가정용품과 환매하셨다고 했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그 위인전집은 조악한 종이질에, 지금으로 따지면 위인이라고 부르기 힘든 인물들, 즉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는 악당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법한 인물들이 위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비스마르크', '장개석', '아이젠하워', '아데나워(서독의 첫 총리)', '패튼(2차대전)' 등의 인물들이 을지문덕, 강감찬 장군과 어깨를 견주며 자신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그 중에서 어린 나에게 가장 신기했던 인물은 '케말 파샤'였는데 당시 터키 공화국의 건국자로서 터키를 위기에서 구해낸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받는 인물이었다. 특히 집이 가난해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케말 파샤는 동네 묘지에 가서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읽으면서 공부를 했다는 에피소드가 유독 기억에 남았다. (이게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이번에 이슬람 관련 수업을 듣고 나서보니 '케말 파샤'의 진짜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이고 '파샤'는 오스만 투르크에서 고급 관리 혹은 고급 장교를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케말 파샤'는 '케말 장군' 정도의 명칭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차라리 튀르키예 사람들은 그를 '튀르키예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라고 부르는 것이 더 익숙하다고 한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그 위인전은 위인의 이름부터 잘 못 표기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 위대한 '케말 파샤'는 튀르키예 사람들에게 건국의 영웅, 근대화의 아버지로서 칭송받고 있으니 우리로 따지자면 김구, 이순신, 박정희를 모두 합친 것과 같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뿜하면서 튀르키예 화폐에 자신의 초상화를 새겨넣고 있다.   


그 외에 튀르키예와의 기억으로 남은 또 하나의 사례는 '아지즈 네신'이라는 작가였다. 학생들과 새로운 수업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세계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일 년에 4번 정도 진행하는 각각의 방과후 수업에서 세계 각 언어권의 소설들을 찾아 읽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 그 프로젝트는 한 2~3년 하다보니 나중에는 우리가 흔히 잘 알지 못했던 언어권, 예를 들어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 등의 문학을 찾아 읽는 수업으로 발전했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작가 중 한 명이 바로 튀르키예의 국민 작가인 '아지즈 네신'이었다. 


'아지즈 네신'의 작품 중에서 학생들과 함께 읽은 소설은 <생사불명 야샤르>였다. 첨에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떠오르는 느낌은 그냥 '골 때린다'였다. 원래 이 소설은 아지즈 네신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만났던 '오스만'이라는 실존 인물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12막 짜리 라디오 극본이었다. 이 극본이 드라마와 연극으로 큰 히트를 치게 되자 결국 소설로도 창작한 것이다. 이 소설은 튀르키예의 오래된 관료주의를 풍자하고 있는데, 주민등록증이 없어 인생의 대부분을 어려운 처지로밖에 살 수 없었던 '야샤르 야샤마즈'라는 인물의 황당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학교를 갈 때는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았고, 군대갈 때는 산 사람 취급을 받았으며, 아버지 빚을 갚을 때는 살아 있고, 아버지 유산을 받을 때는 죽은 사람이 되는 황당한 이야기가 이 소설의 중심 내용이다. 


이 소설을 학생들과 이야기할 때 나는 두 소설과 비교하였는데, 하나는 채만식의 <태평천하>였고, 또 하나는 카프카의 <소송>이었다.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입가를 미소짓게 만든다는 측면에서 채만식과 아지즈 네신이 닮아 있다고 생각했으며, 주민등록이라는 행정적 승인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결국 그 자격을 획득하지 못하고 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감방에 가게 된다는 점에서 아지즈 네신이 카프카의 코믹 버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아지즈 네신에 대한 관심이 생겨 한국어로 번역된 작품들을 찾아보았는데, - 놀랍게도 모두 '이난아' 선생 한 사람의 번역이었다. 오르한 파묵의 작품도 모두 이분의 번역이다 - 그의 날카로운 풍자에 흥미를 느끼면서 학생들에게도 많이 추천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아지즈 네신의 삶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살펴보면서, 그의 놀라운 생애에 대해서도 흥미를 갖게 되었다. 풍자의 정신은 작품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그는 독재 정권에 의해 여러 번 감방에 가게 된다. '오스만'을 만난 것도 이런 삶의 행적때문이다. 


그의 삶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그 하나는 튀르키예 국민 전체를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디스해버린 사건이다. 그는 텔레비전에 나와서 '튀르키예 국민의 60%는 바보다'라는 말을 해서 커다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문제가 커지자 해명이랍시고 다시 방송에 나와서 '실은 92%라고 말하고 싶었다'라고 말해 버렸다고 한다. 오늘날 같았으면 바로 매장되었을 법한 사건이다. 오르한 파묵의 <눈>이라는 소설 속 이슬람주의자와 세속주의자의 논쟁이 벌어지는 장면에 이런 표현이 나와 있을 정도다.


자네도 자만심으로 가득 찬 그 무신론자 작가처럼 우리들을 바보라고 생각하나 보지? 그렇다면 솔직하게 얘기하게. 그 무신론자는 최소한 죽어서 지옥에 가기 전에, 텔레비전 생방송에 나와 우리 눈을 쳐다보면서 모든 터키 민족이 바보라고 용감하게 말했으니까


이런 에피소드가 보여주듯 아지즈 네신은 세상의 불의와 권위적 행동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지속했으며,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 대한 실천적 행동을 멈추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풍자는 세계를 웃음거리가 되는 것으로부터 구해준다'라는 그의 말은 그가 왜 풍자를 멈추지 않았는지는 잘 보여주는 언급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삶에서 두 번째 인상적인 장면은 그가 평소에도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알뜰하게 모은 재산을 모두 고아들을 양육하는 목적으로 설립된 '네신 재단'에 바쳤으며, 죽고 난 뒤에 모든 인세 및 수입을 재단에 기부하여 부모 없는 아이와 가난한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그야말로 강강약약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데, 권력이 저지르는 부조리에는 강력한 풍자의 창을 꽂아넣었지만, 가난하고 힘든 자들에게는 쉼터가 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6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 또한 '아지즈 네신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서민들의 대변자이다'라고 썼다.

(이난아, 「터키 작가 아지즈 네신, 실천하는 지성」,『오늘의 문예비평』2009 여름, 통권 73호 참조) 


그의 작품은 꽤 많이 번역이 되어 있다. 학생들과도 읽어볼 수 있을 만한 우화 작품들도 많이 있고, 읽을 때 빙그레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옛날 이야기같은 작품들도 많이 있다. <제이넵의 비밀편지>와 같은 작품은 학교와 가정교육의 폐단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니 학생들과 읽어보기 좋은 작품이 아닐까 한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세상은 넓고 읽을 작품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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