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절반도 안 지났네

by 아마도난

'부르르'하고 울리는 핸드폰 진동이 허리춤 움찔하게 했다. '결혼기념일'을 저장해둔 캘린더 앱이 알람 울린 것이다. 람을 끄며 생각해 보니 결혼한 지가 느덧 30년 하고도 4년이 더 지났다. 름 오랜 세월 동안 한 여자와 티격태격, 알콩달콩 살아왔던 것이다.


어느 해 봄날, 고향 후배의 주선으로 한 여자를 만났다. 첫인상이 좋았다. 마음이 앞서 가니 입도 정신없이 따라갔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아내도 내 언변이 좋아 같이 살면 심심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했었단다. 사실 그날 소개받기로 한 여자는 따로 있었. 그때 운명의 여신이 장난을 쳤는지 아니면 삼신할미가 뒤늦게 알고 끼어들었는지 그 여자분에게 갑작스러운 일이 생겼다. 그날 아내는 친구의 탁을 받고 대신 나왔가 내 마음을 사로잡아버린 것이다.


콤한 추억을 쌓아도 모자랄 시간에 결혼하자고 우기는 남자와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다는 여자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멋진 곳에서 밀어를 속삭이는 대신 여자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를 써야 했고, 근사한 당에 갔도 음식을 그대로 남기고 헤어지기 일쑤였다. 슬아슬하게 만남을 이어갔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또한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았다.


결혼하고 참 동안은 결혼기념일과 선물을 잊지 않았다. 마음을 보여줄 수 없으니 물질로 대신한 것이다. 부싸움을 하다가도 '어떻게 한 결혼인데...' 하고 중얼거리는 것만으로 모든 게 봄눈 녹듯 스르르 풀려버리곤 했다. 그렇게 애틋했는데 세월이 흐르면 마음도 뀌는 걸까? 나이를 한 살 두 살 더 먹으면서 결혼기념일도, 기념일 선물도 잔소리를 고서야 떠올리는 지경이 었다. 번번이 아내에게 가지를 긁히게 되니 기억하고 있다는 시늉이라도 하려고 핸드폰의 캘린더 앱에 결혼기념일을 입력해 놓았다. 그 핸드폰이 역할을 제대로 한 것이다.

1년 남은 결혼 35주년. 산호 혼식이라고도 한단다. 정말로 전해오는 이름인지 상술이 만들어낸 이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은혼식을 그냥 넘겼듯 번에도 넘어가기로 했다. 내는 내가 결혼기념일을 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다가올 결혼 50주년, 금혼식마저 모른 척 넘길 만큼 몰염치(?) 하지는 않다.


결혼 50주년을 지나면 60주년이 기다리겠지? 결혼 60주년을 유럽은 다이아몬드(금강) 혼, 우리나라는 회혼이라고 다. 조선시대에는 회갑(回甲), 회방(回榜, 과거에 급제한 지 60년이 되는 해), 회혼(回婚)을 3대 수연(壽宴,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이라고 다. 그만큼 60년 세월은 의미가 깊은 간인 것이다. 요즘처럼 100세까지 사는 세상에서도 회혼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세월이 아니겠지만 다산 정약용처럼 내게도 행운이 있어 회혼식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다산은 회혼일 아침에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생의 많은 시간을 유배지에서 냈지만 회혼 일을 3일 앞둔 1838년 2월 19일 아내에게 '회혼시'를 바치고 회혼일 아침에 고향집에서 세상과 작별했 것이다. 든 세월을 보냈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에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했으니 국은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겠는가?


60년 풍상의 바퀴는 눈 깜짝할 새 굴러왔지만
복사꽃 화사한 봄은 신혼 때와 같네
살아 이별, 죽어 이별이 늙음을 재촉하나
슬픔은 짧고 기쁨은 깊었으니 임금님 은혜겠지
오늘 밤 뜻 맞는 대화가 새삼 즐겁고
그 옛날 붉은 치마엔 먹 흔적이 남아 있네
나눠졌다가 다시 합해진 내 모습 같은
술잔 두 개 남겨두었다 자식에게 물려주려네.


六十風輪轉眼翩(육십풍륜전안번)

穠桃春色似新婚(농도춘색사신혼)

生離死別催人老(생리사별최인노)

戚短歡長感主恩(척단환장감주은)

此夜蘭詞聲更好(차야란사성경호)

舊時霞帔墨猶痕(구시하피문유흔)

剖而復合眞吾象(부이복합진오상)

留取雙瓢付子孫(유취쌍표부자손)

-정약용, 회근시(回巹詩)-


조선시대 회혼례.


유럽에서는 결혼 60주년 금강혼이라 하지만 미국에서는 75주년을 금강혼이라 한단다. 이왕이면 미국식 금강혼인 75주년까지 살아볼 수는 없을까? 지난 34년 동안 잘 살았으니 앞으로 40년도 잘 살아서 결혼 75주년이 되는 날 아침에 다산처럼 아내 곁에서 삶을 마감하 행복한 남자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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