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비, 금요일 비, 토요일 비 그리고 일요일 오전 비. TV에서 날씨 정보를 알려주는 기상 예보관은 말투도, 표정도 매력적인데 그녀가 알려주는 제주도 날씨는 가슴을 꽉 막히게 했다. 이번에는 광치기 해변을 제대로 걷고 싶었는데 그녀의 얘기대로라면 또다시 날씨가 발목을 잡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고 날씨 정보를 매일 확인해도 별로 바뀌지 않았다. 마침내 ‘이런 망할~!’ 하고 욕이 나왔다.
올레길 완주를 목표로 올레 17길의 중간지점인 제주공항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걷기 시작한 지 8년. 성산일출봉 옆 광치기 해변에서 시작하는 올레 2길 등 몇 코스를 제외하고 거의 완주했다. 당시 성산일출봉에 도착했던 날에도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다음 날, 아침 식사하려고 들른 식당에서 주인은 우리가 올레꾼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제주도 비바람은 제법 거칠어요. 오후에는 비가 잦아진다고 하니 오전에는 숙소에서 쉬고 오후에 출발하는 게 좋겠어요.”하고 조언했다. 세상에 청맹과니가 따로 없지… 걱정해주는 사람에게 인사치레로만 ‘고맙다’라고 대답하고 길을 나섰다. 그의 조언을 귓등으로 들은 대가는 컸다. 광치기 해변을 가득 채운 거센 바람 앞에서 우산은 금방 쓰레기통으로 사라졌고, 우비는 빗물받이가 되어 신발을 물로 가득 채웠다. 결국 물에 빠진 생쥐 꼴에 한기도 느껴져 올레 2길은 물론 올레 3길마저 건너뛰었다.
그때 건너뛰었던 길을 5년여 만에 다시 걸으려고, 올레길 일주를 완성하려고 하는데 또다시 비가 온다는 예보가 나온 것이다. 다행히 출발일이 가까워지면서 날씨 정보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목요일부터 일요일 오전까지 내린다던 비가 토요일 오전부터는 갠다는 것이다. 날씨가 조금씩 나아진다고는 해도 광치기 해변을 걸으려는 날엔 비가 온다니 심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금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커튼부터 걷었다. 거친 바람과 함께 제법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혹시나 했던 기대가 무너지자 ‘날씨 정보가 틀리는 날도 많더니 이번에는 어째서 정확하게 맞히는 거야?’ 하며 공연스레 기상청을 원망했다. 제주도 특유의 거센 비바람을 맞으며 광치기 해변을 걸을 자신은 없고, 그렇다고 숙소에서 그냥 뒹굴기도 싫었다. 망설임 끝에 광치기 해변은 뒷날로 미뤄두고 길을 나섰다. 이번에도 올레 2길을 마무리 짓지 못하게 됐다는 아쉬움을 발뒤꿈치에 매달고…. 길을 나선 지 한 시간쯤 지나자 비는 조금씩 잦아드는데 바람은 좀처럼 얌전해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바람에 시달리던 우산이 점점 형태를 잃더니 대수산봉을 지나 혼인지에 이르자 마침내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지난번에는 광치기 해변에서 비바람에 시달린 우산과 작별하더니 이번에는 혼인지에서 작별했다. 올레 2길에만 들어서면 우산과의 인연이 다하는 모양이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올레 2길의 종점인 온평 포구에 도착하자 비는 완전히 그쳤다. 그뿐인가? 어처구니없게도 구름 사이로 햇살도 내리쬐기 시작했다. ‘차라리 오전에 맑고 오후에 비가 왔더라면 광치기 해변에서부터 올레 2길을 걸을 수 있었을 텐데….’
심술궂게 부는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햇살은 점점 더 따사한 봄기운을 뿌렸다. 해가 질 때까지는 시간도 남아있어 섭지코지로 향했다. 역시 멋지다. 풍광이 아름다운 섭지코지를 두루 걷고 나니 체력이 완전히 소진되어 광치기 해변이 눈앞에 있는데도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바람은 더욱 거세졌고 날도 저물기 시작했다.
‘도대체 나와 광치기 해변 사이를 이간질하는 게 누구야?’ 하며 다시 찾아올 핑계 하나 남겨두고 일정을 마무리했다. 혹시 다시 찾아올 그날도 비바람이 불어대는 것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