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마도난 Dec 19. 2023

깨끗하다는 것은

핸드폰에 낯선 전화번호가 떴다. 조심해야 할 게 많은 세상이라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여기 ○○○○인데요 최** 님이시죠?”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상대방이 물었다. 회사 이름을 제대로 듣지 못해 “어디라고요?”라고 반문하자 “○○○○입니다. 최** 님 맞으시죠”라고 반복했다. “잘못 걸었습니다.”라며 전화를 끊었다. 10여 분이 지났다. 새로운 번호로 전화가 와서 “최** 님 핸드폰 아니세요?”라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잘못 걸었습니다.”라며 무뚝뚝하게 전화를 끊었다. ‘최**’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기분이 나빠진 탓이다.


몇 년 전, 갑자기 하루가 멀다고 여러 택배사에서 배송 안내 문자가 들어왔다. ‘최** 님, 주문하신 상품이 오늘 배송됩니다.…’ 한두 번으로 끝났으면 단순 실수로 간주하고 넘겼을 텐데 많을 때는 하루에 2~3번씩 안내 문자를 받다 보니 퍼뜩 불안해졌다. 혹시 물품 결제 대금이 내 계좌에서 나갔나 하는 의심이 든 것이다. 예금계좌 모두를 살펴보니 다행히 금전적 손실은 없었다. 그래도 찜찜한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때 다시 택배사에서 안내 문자가 들어왔다. 문자를 보낸 택배기사에게 전화해서 “최**가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앞으로 배송 안내 문자가 내게 오지 않도록 해달라”라고 요청했다. 그는 “나는 송장에 적힌 대로 배달할 뿐이어서 방법이 없으니 그 사람이 물건을 산 회사로 전화해보세요.”라며 끊었다. 판매회사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다시는 안내 문자가 오지 못하게 조치해달라고 부탁했다. 고객센터 상담원은 난감해하며 자기들이 임의로 고객정보를 고칠 수는 없다고 했다. 다른 판매회사에도 전화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판매회사가 고객정보를 임의로 고칠 수 없다는 것은 이해됐지만 황당했다. 게다가 최**에게 연락할 방법도 없으니 그냥 덮어두어야 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내 전화번호가 다른 사람 명의로 이용되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이를 바로 잡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었다. 궁리 끝에 카카오톡과 문자메시지에 ‘최**’을 차단 문자로 설정했다. 내게 꼭 필요한 소식을 누군가가 보내오더라도 ‘최**’이라는 문자가 담기면 안 보겠다는 옹색한 차선책이었다.


몇 년 동안 ‘최** 님….’ 하는 문자메시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 평온함이 낯선 전화번호를 타고 들려 온 그의 이름과 함께 깨졌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라 보이지 않도록 가려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이렇게 어리석었다니…. 금전적 손실이 발생하지 않아 모르는 게 약이라고 생각하고 산 것만 같아 화가 났다.



옛날에 밥을 날달걀에 비벼 먹는 것을 좋아하는 마님이 있었다. 어느 날, 몸종이 밥상을 들고 오다 달걀을 마루에 떨어뜨려 깨고 말았다. 그 광경을 문틈으로 본 마님은 몸종이 달걀을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았다. 몸종은 마루에 떨어져 깨진 달걀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접시에 담아 내왔다. 괘씸하게 생각한 마님이 몸종에게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하고 물었다. 먼지나 잡티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 불호령을 내릴 생각이었다. 몸종은 “안 보이면 깨끗한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몸종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한 마님은 그녀를 용서했다.


최**가 내게 피해를 준 것은 아직 없다. 무슨 이유로 내 전화번호를 연락처로 삼았는지 모르지만 전화번호가 도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께름칙해진 것뿐이다. 안 보이면 깨끗한 것이라는 몸종의 말처럼 그의 이름을 보지 않았을 땐 평온했는데 그의 이름을 듣자 다시 심란해졌다. 황당한 것은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욱’하고 치솟았던 분노가 문제해결 과정이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면서 물거품처럼 가라앉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병아리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가짐이라니….


혹시 내가 덮어두고 있는 것이 ‘최**’ 문제뿐일까? 안 보인다고, 눈을 감았다고 모든 게 해결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갑자기 몸종의 ‘안 보이면 깨끗한 겁니다.’라는 대답이 불편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물결 따라 사라진 떼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