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건국하고 2년이 지난 1394년 4월. 조선은 명나라의 『대명회전』 (명나라의 종합법령집으로 조선의 경국대전에 해당)에 ‘옛날 고려 권신 이인임의 후사 이단(李旦, 이성계)이 사왕(四王,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을 시해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려 우왕 때 국정을 농단하던 이인임이 이성계와 최영에 의해 제거된 후 잔당인 윤이와 이초가 명나라에 거짓 고자질한 것을 그대로 『대명회전』에 기록한 것이다. 조선은 이성계의 혈통을 바로잡고(宗系), 4명의 왕을 죽였다는 기록도 무고라는 사실을 알리려고(辨誣) 매년 종계변무(宗系辨誣) 주청사를 보냈다. 명나라는 관심이 없고, 대부분의 조선 백성은 알지도 못했던 종계변무가 해결된 것은 1589년. 200여 년 만에 숙원을 해결했다고 좋아하던 선조의 기쁨 뒤를 따라온 것은 1592년에 시작된 임진왜란이었다.
명분에 매달려 세월을 허송한 조선은 임진왜란에서 교훈을 얻었을까?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635년 5월. 서인계 정치인과 유생 270여 명이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묘에 올려 제사를 지내자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에 대해 남인계 정치인과 유생은 반대 상소를 올렸다. 율곡은 중이 되겠다고 출가한 적이 있으므로 자격이 없고, 우계는 임진왜란 때 피난하는 선조를 호종하지 않았으므로 역시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문묘종사(文廟從祀) 논쟁이다. 문묘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으로 이곳에 배향된 인물은 최고의 학자로 존경받았다. 조선이 문묘종사 논쟁에 몰두하고 있을 때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홍타이지는 황제 즉위식을 했다. 또한 청나라는 명을 공격하기 위한 물자지원도 조선에 요구했다. 국제정세가 급변하는데도 조선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문묘종사 논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국난에 대비하기보다 집단의 이익에 더 몰두한 것이다.
병자호란 후 조선은 교훈을 얻었을까?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청나라에게 당한 ‘삼전도의 치욕’을 앙갚음하겠다며 소위 ‘북벌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실현 가능성도, 실천 의지도 없는 내부 호도용 정책으로 평가한다. 비록 허울뿐인 정책이었다 해도 효종은 북벌을 명분으로 군사를 양성하고, 조총을 개량했다. 병자호란 이후 가라앉은 사회 분위기를 그나마 일으켜 세운 것이다.
조선의 고질병은 효종의 서거와 함께 다시 재발했다. 제1차 예송논쟁(禮訟論爭, 기해예송)이 벌어진 것이다. 서인은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이 아니니 계모인 자의대비는 1년간 상복을 입으면 충분하다고 주장하였고, 남인은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집권 세력인 서인의 주장대로 1년간 상복을 입는 것으로 매듭 되었다. 그 후 효종의 부인인 인선왕후가 서거하자 다시 자의대비가 얼마나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는 논쟁이 일어났다. 제2차 예송논쟁(갑인예송)이다. 인선왕후가 맏며느리가 아니니 9개월 동안 상복을 입으면 충분하다는 서인의 주장과 왕비였으니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남인의 주장이 대립한 것이다. 제2차 예송논쟁은 당시 집권 세력인 남인의 주장대로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은 표면적으로는 관혼상제의 문제였지만 실제로는 권력다툼으로 집권 세력의 주장이 관철됐다. 주목해야 할 점은 효종의 서거와 함께 조선에 그나마 남아있던 역동성도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때부터 능동적으로 세계사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조선은 속절없이 불행한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들어갔다.
조선 시대의 악습이 역동적인 대한민국에서는 사라졌을까? 과거에 발목 잡히고, 실속 없는 명분에 얽매여 실리를 잃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고 있는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도 교훈을 얻지 못한 조상들의 전철을 지금의 우리가 반복하고 있지 않은지 뒤돌아볼 때다. 더불어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도 되새겨봐야 할 때다. 두렵다. 혹시나 하면서도 자꾸 염려가 드는 것은 가을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