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과 진실 II

군산에서 부여까지

by 아마도난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무너뜨리고 난 후 당나라 고종은 신라의 김유신, 김인문 그리고 김양도에게 포상을 한다. 김유신은 누구나 다 아는 우리나라의 영걸이고, 김인문은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당나라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공격한 핵심 인물이니 수긍이 간다. 김양도가 이들과 나란히 포상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김양도는 버드나무와 갈대를 엮어 만든 버들 자리로 백제의 저항을 뚫고, 서해안의 거대한 갯벌지대를 가로질러 당나라 군대가 성공적으로 상륙할 수 있게 했다. 그만큼 백제의 저항이 거셌고, 버들 자리가 위력을 발휘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금강하구에 도착한 당나라군은 김양도의 버들 자리를 앞세워 어디로 상륙했을까? 금강하구에서 부여 근방까지 지도를 면밀히 살펴보니 당나라는 군산 근방에서 상륙했을 것이라는 각이 들었다. 군산의 맞은 편인 서천으로 상륙했다면 사비성을 공략하기 위해 금강을 건너야 하지만 군산 쪽으로 상륙하면 육로로 사비성에, 지금의 부여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짐작을 확인하고 싶어서, 다른 한편으로는 1,300여 년 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산에서 부여까지 금강을 따라 었다.


금강하구둑에서 상류방향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오성산이 있다. 백제의 멸망과 관련되어 전해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당나라 소정방이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러 가다가 오성산에서 짙은 안개에 갇혀 길을 잃었다. 바로 그때 5명의 노인이 나타나자 소정방이 사비로 가는 길을 물었다. 노인들이 대답하기를 “너희가 우리 백제를 공격하러 왔는데 어찌 적에게 길을 가리켜 준단 말이냐!” 하며 거절했다. 이에 분노한 소정방이 다섯 노인을 죽였다고 한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로 돌아가던 소정방이 다시 이곳에 들러 노인들의 충절을 기려 시신을 수습하고 후하게 장사를 치러주었다고 한다. 그때 이후 이 산의 이름이 오성산이 되었다고 한다. "


오성인 묘

백제는 상륙을 시도하는 당나라 군대를 맞아 오성산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결사적으로 항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정방이 오성산에서 만났다는 5명의 노인들은 이 싸움에서 전사한 백제 장군들 달리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금도 군산시는 이들 오성인을 기리는 행사를 하고 있다.


오성산을 지나자 나포 너른 들이 나타났다. 고려말 최무선 장군이 왜구를 토벌할 때 사용했던 화포를 시험하던 곳이다. 바로 그 땅에서 오성산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전열을 정비했을 당나라 군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에는 거대한 선단을 이룬 수군이, 강변에는 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진군하는 육군의 모습을 떠올리며 길을 걷다 보니 울컥하는 기분과 함께 눈물이 나려 했다. 하늘도 그 마음을 알았는지 짙은 안개로 사방을 덮어 우울함을 가려줬다. 나포를 지나 웅포를 향해 가며 마을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메모하고, 강바람이 속삭이듯 알려주는 이야기를 기억 속에 저장했다. 안개가 걷히자 비단강 길이 들릴 듯 말 듯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 첫날은 웅포에서 묵었다.



다음날, 웅포에서 성당을 지나 강경으로 향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웅포대교를 건너 유왕산으로 향했다. 당나라로 압송되어가는 의자왕의 안녕을 빌며 수많은 백성들이 통곡을 했다는 작은 언덕이다. 의자왕이 패륜아였다면, 사치와 방탕으로 나라를 기울게 한 왕이라면 이런 전설이 전해올까? 의자왕이 당나라로 끌려간 음력 8월 17일 유왕산에서는 의자왕과 임금의 안녕을 빌던 백성들을 기리는 추모제가 열린다.


유왕산에 있는 비석. 거북의 목이 180도 돌려있다.

유왕산에 올라 금강을 내려다보며 끌려가는 의자왕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당나라 군대를, 신라군을 능히 물리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하다가 패하여 포로로 끌려갈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당나라 군대가 덕물도(화성시 덕적도)에 도착했을 때 백제는 나당연합군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두고 전략회의를 한다. 누구와 먼저 싸울 것인가에 이견이 있지만 신라는 자신들의 적수가 안 된다는 기본적인 생각이 깔려 있는 작전회의였다. 백제는 의직의 주장을 채택하여 당나라와 먼저 싸우기로 결정한다.


좌평 의직(義直)은 "당나라가 우리에게 패배하는 모습을 보면 신라는 감히 나서지 못할 것"이라며 당나라를 먼저 치자"고 제안했다. 반면 달솔 상영(常永)은 "당나라와는 대치국면을 유지하고, 약한 신라군을 먼저 격파한 뒤에 당나라를 치자"라고 제안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6월)


지리적 이점을 안고 있던 백제는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믿음은 신라 장수 김양도의 버들 자리로 인해 산산이 깨지고, 전쟁의 양상은 처음부터 백제가 의도했던 것과는 다르게 전개된 것 같다. 그렇다고 백제가 지리멸렬하게 당한 것도 아니다.


"당군은 조수를 타고 배가 꼬리를 물고 나아가며 북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바로 도성으로 나아가 30리쯤 되는 곳에서 멈추었다. 우리 군은 모든 병력으로 막았으나 또 패하여 죽은 자가 만여 명이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당나라 군대는 백제군의 저항을 뿌리치며 사비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신라군을 기다린다. 그 30리 지점이 어디일까?


반조원(頒詔院)이라는 이름은 백제 사비성을 공략하기 위해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곳에 진을 치고 '반조', 곧 당나라 황제의 조서를 반포했다고 하여 생겼다고 합니다. 수로를 따라 사비를 향해 북진하던 도중 임천의 가림성을 통과할 수 없어 이곳 반조원에서 신라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데 당나라 황제가 조서를 보내온 것입니다. 이를 읽은 소정방은 작전을 바꾸어 북진을 계속하고 육로로 오는 신라군과 합세하여 사비성으로 들어갔다고 해요.
(출처 : 부여군청)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다. 백제가 망하고 의자왕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끌려갈 때 걸린 시간이 두 달이었다. 이처럼 먼 곳에서 벌어지는 전황을 당나라 황제가 알 리도 없고, 조서를 보내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반조원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논산시 강경읍과 마주 보고 있다. 오늘날 행정구역상으로는 '부여군 세도면 반조원리'가 바로 그곳이다.


기록에 나타난 사실을 확인하려고 택시기사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그곳을 찾아갔지만 나당연합군 18만 명이 집결할 만한 너른 들판을 찾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군산에서 사비성으로 향하는 당나라군의 공격로에서도 벗어난 곳이었다. 사실이라기보다는 정방이나 김유신을 미화하기 위해 사후에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겸재 정선이 반조원에서 그린 '임천 고암(林川鼓岩)'의 배경이 되는 곳이나 살펴보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림에 나타난 지형과 비슷한 곳은 없었다. 겸재가 사실보다는 훨씬 과장된 그림을 그렸던지 아니면 지형이 크게 바뀐 탓일 것이다. 실망해서 그랬을까? 피로가 엄습해 왔다.


겸재 정선, [임천고암]


반조원을 떠나 강경으로 향했다. 나당연합군이 집결한 곳은 반조원이 아니고 강경 근처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밤을 강경에서 보내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강경에서 10여 리쯤 가니 논강 평야가 나타났다. 100만 명이라도 족히 진영을 설치할 수 있을 만큼 너른 들이어서 나당연합군이 백제와의 최후 결전을 앞두고 전열을 정비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다. 강 건너편이 반조원이다. 부여 방향을 바라보니 강에 잇대어 우뚝 솟은 산이 보였다. 파진산(破陣山)이다. 임천의 가림산성과 함께 사비성을 지키는 중요한 방어기지였다. 이곳이 나당연합군과 백제가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정방이 꺼리는 것이 있어 앞으로 전진하지 않자, 유신이 달래어 신라군과 당군이 용감하게 네 길로 나란히 나아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7년 7월)


파진산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논강 평야를 지나 금강을 따라 파진산을 지나는데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파진산 자락에 앉아 휴식을 겸해서 준비해온 음식물로 점심 요기를 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나당연합군은 기세 등등하게 이곳을 지나 사비로 진격했겠지만 전투에 패한 백제군은 혼비백산해서 달아나지 않았을까? 사비로 향하는 마음이 정반대로 교차했을 파진산 기슭에서 휴식을 취하다 소설 제목을 [대륙에 남긴 꿈]에서 [사비로 가는 길]로 바꿨다.


군산에서 부여까지 금강을 따라 걸으며 소설 구상을 마쳤다. 그때 채집된 이야기를 가미하여 작품도 완성했다. 하지만 소설 제목은 [대륙에 남긴 꿈]과 [사비로 가는 길]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원고를 검토한 출판사가 [사비로 가는 길]을 추천했고 부제로 '지워지지 않는 의자왕'을 제안했다. 첫 번째 소설 [지워지지 않는 나라]와도 연결되는 부제여서 출판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두 번째 소설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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