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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세미 Dec 06. 2021

편도티켓의 여행

12. 편도티켓의 여행



하리의 유골함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장 보물 칸에 두었다.

그 보물 칸에는 인생영화인 ‘토이스토리’의 장난감들과 가진 것 중 가장 비싼 인형이 있다. 장난감과 인형 사이에 하리의 액자를 두고 그 앞에 유골함을, 그 주변에 하리가 좋아했던 간식들과 캣잎쿠션을 놓았다. 안 그래도 북적거리던 보물 칸이 여백 없이 빽빽해졌다.




한동안은 하리의 유골함 앞에 사료와 간식, 물을 매일 아침 놓아주었다. 내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하리가 아직 떠나지 않은 것 같았다. 투명고양이가 되어 집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는 건 아닐까. 하루가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거실 구석에 사실은 하리가 있는 건 아닐까. 고양이는 사람이 보지 못하는 걸 본다고 하니까. 같은 비이성적인 생각들이 실제처럼 느껴졌다.


잘 먹지도 않고, 잘 자지도 않고, 매일같이 울다가 하리의 사진들을 정리하고, 영상을 만들어서 올리고, 도대체 하리가 왜 낫지 못하고 떠나야 했는지 원인을 찾으려고 인터넷의 글들을 샅샅이 뒤졌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최선을 다했으니 자책하지 말라고 위로했지만 실은 모든 게 나의 잘못 때문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리는 아기가 아니었어. 하리는 12살이었어. 할머니였어,”

어느 날 지인이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렇다. 하리는 12살이었다. 인터넷으로 찾아봤더니 사람나이로 치면 65세정도 라고 했다. 65세라면 엄마와 동갑인 나이다. 수술과 항암을 이겨낸 엄마처럼 우리 하리도 어쩌면 잘 이겨내고 더 살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드니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고마운 말이다.




한 달 뒤에는 대상포진에 걸렸다. 나름대로 마음을 추슬렀다고 생각한 시점에 덜컥 몸이 아파왔다. 병원에 가서 항바이러스제 약을 받아 일주일동안 먹었더니 대상포진의 흔적이 옅어져갔다. 사람은 이렇게 병원에 가고 약만 먹으면 아픈 곳이 금방 낫는다. 새삼 사람이 살기에 참 좋은 세상이구나 싶은 동시에 고양이가 살기엔 아직 부족한 세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리가 떠나고 대상포진에 걸리는 동안 집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다. 작업실에 출근하지도 않고, 미팅이나 회의는 코로나 핑계를 대면서 온라인을 통해 화상으로 진행했다. 그것조차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리를 치료하며 든 카드값을 갚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참아냈다. 카드값의 힘은 강력하다. 죽도록 하기 싫은 일도 어떻게든 하게 만든다.


한 달 반 정도가 지났을 때 어디든 밖으로 나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의 끝자락에 글쓰기 수업에 등록했다. 후기 중에 나이와 직업을 밝히지 않고 진행한다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얼굴도 모를 테고 밝히는 건 이름뿐이다. 나와 하리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고 싶었다.


글쓰기 수업은 꽤 재미있었다. 드라마를 쓰면서도 몰랐던 새로운 글쓰기에 대해 배웠다. 나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으면서도 하리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히 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6주의 수업이 끝나면 그동안 쓴 글을 모아 책으로 내준다. 나는 당연히도 하리에 관한 에세이를 쓰기로 했다. 전 날까지도 하리의 마지막 모습만 떠올리며 울던 내가 에세이를 쓰기 위해 하리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려봤다. 처음으로 눈을 마주쳤던 순간도, 울고 있는 날 위로해주던 모습도,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스크래처를 벅벅 긁던 모습도 떠오르니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슬픈 기억보다 좋았던 기억이 더 떠오른다는 지인의 위로가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에세이의 제목은 ‘편도티켓의 여행’으로 지었다. 하리가 돌아오는 티켓이 없는 편도 여행을 떠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도 그 티켓을 끊고 하리가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 곳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또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하리가 내게 준 사랑이 나를 변화시켰고 내 세계를 바꿨다. 그러니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하리가 내게 준 아름다운 사랑과 세계가 남아있으므로.


언젠가 다시 만날 때까지 기쁘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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