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드라마의 법칙
사람에겐 평생 인생을 바꿀 세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한다.
회사에 사직서를 던지고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그럭저럭 지내온 지 2년. 그 사이에 혼자이던 작업실엔 두 마리의 고양이가 생겼고, 나의 생일 케이크엔 기다란 초가 세 개 꽂혔다. 지금까지는 적당한 행복과 적당한 불행이 뒤섞인 미온한 인생이었다. 그러니 나에겐 아직 인생을 바꿀 기회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것이다.
서른인데. 벌써 긴 초가 세 갠데.
‘아무리 백세시대라지만 이쯤 한 번의 기회정도는 찾아와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러다 호호할머니 됐을 때 세 번 다 우르르 한꺼번에 오는 거 아니지? 그건 싫다! 싫다고 했어!’생일케이크에 대고 툴툴거렸더니 얼마 뒤 정말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내가 집필한 드라마의 제작이 결정된 것이다.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무스펙의 여자 주인공이 서른이라는 애매한 나이에 새로운 꿈에 도전해 고군분투 끝에 성공하는 드라마. 이런 드라마가 클리셰가 된 건 어쩌면 보통의 시청자들이 모두 한번쯤 꿈꿔본 적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나부터 그랬고.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드디어 내 인생에 첫 번째 기회가 찾아 온 것이다. 이 기회로 꿈을 이루고 인생이 바뀌고 분명히 행복해질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속에선 이미 백상예술대상에서 드라마 작품상을 받을 때 어떤 소감을 얘기할까 상상하는 단계까지 갔다.
그 순간엔 바보처럼 드라마의 법칙을 잊었다. 드라마의 법칙, 주인공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불행한 일을 마주하게 된다.
낮에 울리는 휴대폰 전화벨. ‘엄마’였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엄마가 지금 어디를 다녀오는 길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엄마의 왼쪽 가슴에서 만져진 딱딱한 몽우리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병원에 들러 초음파를 받고 오는 길일테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행복한 상상들이 끔찍한 생각들로 변해갔다. 큰 행복은 없었지만 큰 불행도 없었던 인생이었으니 어쩌면 이번에도 별 일없이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들을 애써 떨쳐내며 전화를 받았다.
결론적으로 엄마는 유방암 선고를 받았다.
대학병원에 가서 온갖 검사를 하고 빠르게 수술 날짜를 잡았다. 나는 거의 하루 종일 유방암 환우들의 카페글을 읽는데 시간을 할애했다. 모르는 세계는 내게 공포다. 똑같은 지옥이라도 미리 파악하고 가는 편이 마음이 놓인다. 수술 전, 대학병원 교수님들이 모인 곳에 앉아 수술과 이후 항암 스케줄 등을 브리핑 받는 자리가 있었다.
“허투로 나오면 무조건 항암인거죠?”
내 질문에 교수님들이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고, 엄마는 “얘가 공부를 많이 했어요.”라며 은근히 자랑을 했다. 브리핑이 끝난 후에는 병원 지하에 있는 식당에 가서 왕돈가스를 먹었다. 엄마는 돈가스가 맛있다며 그 큰 접시를 다 비웠다.
수술을 하고 항암을 하면서도 엄마는 내 앞에서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울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씩씩한 척 굴었다. 항암 후유증으로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을 때도,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다 밀어버렸을 때도 “이것 봐, 생각보다 잘 어울리지?”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다. 분명 힘들었을 텐데. 무서웠을 텐데.
엄마와는 달리 나는 씩씩하지 못했다. 내가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세상이 끝난 사람마냥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댔다. 물론 엄마 앞에서는 울 수 없었기 때문에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나, 길거리에서, 카페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다가 울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드라마 진행도 힘들었다. 막상 제작이 진행되고 촬영이 시작되자 감독은 대본 수정을 계속해서 요구했다. 처음에 나는 드라마 제작사와 감독에게 엄마의 수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분명 꼬투리를 잡히거나 대본에 대한 선입견이 생길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암이 시작되며 병원에 동행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나 어쩔 수 없이 감독에게 이 사실을 전했고, 감독이 회사에 얘기를 했다.
“슬픈 일이 있어 그런지 대본이 쳐지네.”
코미디 씬을 수정하고 있는데 도착한 문자.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끝까지 말하지 말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본이 띄워져있는 모니터가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코피가 쏟아지듯 눈물이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 몸에 이렇게 많은 수분이 있었나 싶게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작업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지금 내 기분을 털어놓을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안 그래도 힘든 엄마에게나, 심란한 동생들에게도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울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을까 싶었을 때, 따뜻한 체온이 슬며시 내 몸을 감싸왔다. 무릎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보니 하리가 살며시 다가와 꼬리로 내 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 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깜빡깜빡. 혼자 인 줄 알았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는 존재, 내 눈물을 지켜봐 주는 눈이 있었다. 손을 뻗어 부드러운 하리의 몸을 쓰다듬으니 내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워 조용히 나를 바라본다.
“혼자가 아니야.”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어느 샌가 눈물이 그쳤다. 몸을 일으켜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보란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본을 수정해 보이겠다고 생각했다. 씩씩한 엄마처럼, 씩씩한 딸이 되겠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