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어라 May 04. 2024

작지만 위대한 분무기

초등학교 교실은 다정하다. 겨우 열 살 언저리의 아이들인데 문제를 못 푸는 친구를 도와주고, 넘어진 친구를 기다려준다. 친구가 울면 따라 울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친구의 역할을 대신해주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다친 친구를 위해 급식을 떠다주고 자기 것을 양보할 줄도 안다. 교실에서의 다정한 에피소드들을 글로 옮기다보면 선하고 귀여운 아이들과 함께 해맑은 매일을 보내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된다.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하지만 세상의 모든 교실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당연하게도.  


"너 같은 얼굴도 커플이 되냐?"

"돼지커플이네 돼지커플이야"

"너 00이랑 섹스해봤냐?"

"병신새끼, 너 청각장애냐?"

"니 에미 뒤진 년"

"응 너는 애미 죽인 년"


실제로 지난 한 달간 우리 학년 아이들간에 주고 받아서 담임이 상담하고 지도했던 대화들이다. 쉬는 시간  혹은 점심 시간 그도 아니면 디엠으로 아이들이 주고 받은 말들.


평범하게 오가는 대화를 누군가 듣고 교사에게 밀고하거나, 욕설을 들은 당사자가 고발을 하고 나면 즉시 사건 조사가 이뤄진다. 무엇이 잘못이고 왜 잘못인지 때로 혼을 내고 때로 어르고 때로 상담하며 아이에게 '전달'한다. 같은 아이들끼리 벌어진 일이면 다행이지만 다른 아이들 간의 일이라면 각 담임들끼리 만나서 아이 불러 확인하고 따로 지도 하고 사과 재발방지 약속까지 버라이어티하게 마무리를 짓는다.


이런 말을 하는 아이들이 가정교육이 형편없다거나, 지능이 낮거나 흔히 말하는 문제아가 아니다. 그냥 보통의 어린이, 길다가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아이들이 하는 말이다. 내가 근무하는 지역은 학구열이 높고 경제수준이 높은 지역은 아니지만 그래도 평범 언저리에 있는 곳이다. 그런 아이들도 아무 생각없이 욕설과 비속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상대를 비하하고 무시하는 발언들의 문제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쓴다. 교사 앞에서 직접적으로 발언하지는 않지만, 모둠활동 중에, 쉬는 시간에, 친구들 간에, 아이들이 무시로 쓰는 말들이다. 그래서 많은 교사들이 농담처럼 성악설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아이들을 설명할 수가 없다고.


지도를 위한거라고는 해도 들으면 내 영혼이 상처받을 것 같은 언어들을 아이들 앞에서 하나하나 분해하고 부수다보면 교실에 서 있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고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때가 온다. 말보다 더 폭력적인 물리적 충돌은 더 힘들고, 이를 지도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보호자라는 빌런들의 행태는 글로 옮길수도 없게 더 기가막힌다. 생각보다 자주, 많이, 교사는 줄 끊어진 그네가 모래바닥에 처박히는 것 같은 심정이 된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정함을 과장하는 일이다. 이유없이 베푸는 다정함들이 어떻게 우리를 견디게 하는지, 다정함이 어떻게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지, 내가 목격하는 아이들의 다정함을 더더 포장하고 부풀려서 아이들에게 말해준다.


연달아 터진 욕설사건으로 피폐해진 내가 회복될 수 있던건 분무기 덕분이었다.


교실 창틀에 식물을 놓고 키우기 시작한 지 일주일 쯤 되었다. 아이들은 각자 자신의 화분에 물을 주며 싹이 나길 고대하고 있었다. 집에서 분무기를 가져와 물을 주는 아이들도 있고 빌려서 쓰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들이 하교하고 식물들을 정리하는데, 창틀 위에 메모지가 붙은 분무기가 보였다. 뭔가하고 읽어보니 -


이 분무기는 분무기가 없는 친구들을 위해 설치하였습니다.

메모지 문구를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가에 손을 올렸다. 어쩜 이런 생각을 했는지. 분무기가 이토록 다정할 줄 누가 알았을까. 이 소소한 마음 씀이 선생님에게 어떤 일을 했는지 아이가 알까.


핸드폰을 꺼내 분무기를 찍었다. 그리고 칠판 앞에 다정보석을 하나 더 붙였다. 내일 아침 1교시 시작하자 마자 아이들에게 말해줄거다. 내가 감동한 다정함에 대해, 다정함이 지닌 강력함에 대해 진심으로 얘기해야지. 소소한 배려, 별거아닌 분무기지만 위대하고 훌륭한 분무기라고, 놀라운 다정함이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이전 08화 아니, 양념게장에 이게 안들어갔다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