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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노부부 처음 갖는 자기만의 방

by 피어라

이사. 말그대로 사는 곳을 옮기는 일이다. 이번에 부모님 이사를 도우며 지역만 옮기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서 자신의 공간도 함께 옮기는 변화를 꾀했다. 노부부 각자 자기만의 방을 만든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따로 방을 쓰며 생활하고 계셨지만, 자기 방이라고는 생각지 않으셨다. 엄연히 장롱이 있고 부부가 주인인 큰방, 안방이 있고, 할배는 작은 방에서 잠만 자는 정도로 생각하셨다. 이 참에 아예 방 하나씩 자기만의 방으로 정하고 꾸며드리기도 했다. 자식들은 엄마방, 아빠방으로 부르며 슈퍼싱글 침대를 두 개 설치해드렸다. 깨끗하게 빤 매트커버도 씌우고 그 위에 예쁜 이부자리를 펴놓았다. 안여사는 팔십 평생 처음갖는 자기 침대라며 좋아했다.


"얘, 막내네는 큰 애가 70만원짜리 더블 침대를 사줬다는데, 어쩔 수 없이 부부가 같이 누워자야해서 아주 불편해 죽을라그러더라."

"거봐, 늙어서 같이 자면 불편해. 편하게 따로 주무셔야지. 얼마나 좋아. 따로 침대 하나씩 누워서 유튜브 보다 주무셔."


열 자 장롱이 아니라 각자의 옷장에 자기 옷을 채워넣었고, 각자의 책장에 자기가 보는 책들을 꽂았다. 덕분에 딸들은 분위기에 맞는 커튼과 스탠드까지 고르며 신혼살림 채우는 재미를(?)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작고 소소한 재미를 즐기기 위해서는 자잘하지만 치명적인 실수들을 만회해야만 했다. 그건 변덕스런 엄마탓도 눈치없는 자식탓도 아니다. 원래 이삿날은 물건처럼 마음도 이리저리 옮겨다니는게 정상이다.



부모님 집은 여느 아파트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구조다. 현관 문을 열면 방이 하나 있고 들어오면 양옆으로 거실과 부엌이 늘어서있으며 안 쪽으로 방이 두 개 붙어 있다. 이사 전에 전개도로 가구의 크기와 화장실 등을 고려하여 할매가 쓸 방과 할배가 쓸 방을 정하고 옮길 가구도 다 확정해두었더랬다.

하지만 인생이 어디 계획되로 되던가....막상 짐을 옮기려다보니 창문의 크기와 에어콘 배관 등으로 인해 가져온 장롱 한 짝을 안쪽 방에 넣을 수가 없고 현관 맞은편 방에 넣어야했다. 엄마가 쓰기로 한 가구라 난감해하다가 그럼 엄마가 바깥쪽 방을 쓰면 되겠다 싶어 엄마에게 말하고 다른 가구들도 같이 옮겼다. 열심히 이거저거 옮기는 직원분들께 음료수도 대접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는데 의자에 잠시 앉아있는 엄마가 작게 한 마디 하셨다.


"...건넌방은 일꾼들이나 쓰는 방인데........"

지나가는 엄마의 꿍얼거림을 들은 귀밝은 딸이 아차싶어 재차 엄마의 의향을 물었다.

"아냐, 그냥 아무데나 쓰지 뭐.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아니, 그러지말고 진짜 엄마 마음을 얘기해주세요. 우리 신경쓰지 말고."

"나는, 안방이 좋아......"

.........할매의 '괜찮다'는 진짜 '괜찮다'가 아니라는 걸 간과했다. 어쩔 수 없다. 두고두고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느니, 지금 한 번 민망함을 겪고말지. 얼른 일어나 큰소리로 외쳤다.

"사장님, 죄송해요! 요거 다시 저쪽 방으로 옮길 수 있을까요?"

그렇게 작은 소동 끝에 두 분의 방이 정해졌다. 이사오면서 겪은 혼란에 방을 정하며 치른 소동까지 다 지났다. 이제 짐을 넣으면 정말 끝이다!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작고 소중한 엄마의 방


방이 결정되고 나서는 일사천리였다. 나머지 가구들과 자잘한 짐들이 들어오고 이사가 대충 마무리 되었다. 부엌에 가스가 연결되고 에어컨 배관이 연결되고 통신사 설비가 연결되었다. 옮기기 위해 단절되었던 모든 것들이 다시 복구되며 새로운 곳에서 첫 날이 마무리 되었다. 부모님도 여기에 연결될 것이다.


처음 이사를 결정할 때만 해도 불안해하고 미덥지 못해하던 할매는 새 침대에 누워 새 공간이 주는 설렘을 만끽하며 지내고 계신다. 빚을 갚아 마음도 편하고 집도 너무 좋고 편하다며 예쁘게 꾸미며 살고 싶다 말하신다. 할배는 이사 일주일도 안되어 이미 근처 도서관을 찾아 회원증을 만드셨고, 복지관을 섭렵중이시다. 전철역까지 부지런히 걸어다니시며 인근 지리도 다 익히셨다. 두 분 다 만족하시며 적응하시는 것 같아 내심 뿌듯하고 기쁘다. 설레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다.


오늘로 이사한 지 딱 2주가 되었다. 그동안 삼남매는 쓸고 닦고 조이고 설치하고 고치고 치우고 부지런히 움직이며 정성을 들였다. 이 집에서 시작할 부모님의 새로운 생활, 앞으로의 시간들을 떠올리면 몸을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다. 웃음이 나오다가 눈에 눈물이 고일 것 같다. 그리 긴 시간이 아닐거라는 걸,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늙은 부모님의 이사를 돕던 중년의 자식들은 그래서 오늘도 부모님의 새 집을 구석구석 살핀다.

작은 딸이 라벨지에 뽑아온 양념장 이름표들

큰사위가 손수 달아드린 부엌 간접등

딸이 하나하나 칠해서 메꾼 긁힌 가구

아들이 설치한 세탁기 선반과 가스감지벨브


집안 곳곳에 사랑과 다정함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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