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이야기가 더 좋았을까요?
국민학교 6학년 졸업을 앞두고 중학교배정통지서를 받던 날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이름에 이어 입학하게 될 중학교를 함께 불렀습니다. 제 이름과 함께 중학교 이름이 불리자, 몇몇 짓궂은 아이들이 부러움인지 안타까움인지 모를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가 들어갈 학교는 다가오는 3월에 개교하는 신설 중학교였고, 지역 최초의 남녀공학이었습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때는 전부 남중과 여중으로 나뉘어 있었고, 처음으로 남녀가 같이 공부하는 ‘공학’이 생긴 겁니다. 이렇게 말하니 제가 엄청 나이든 사람 같이 생각되는군요. 뭐, 사실이긴 합니다. 제가 나이가 좀 많긴 하네요.
어쨌든 그렇게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막 개교한 학교라 학생은 1학년 신입생들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저기 공사가 덜 마무리 된 채로 입학생을 받은 학교는 온통 어설펐고, 학생들은 더 어색했습니다. 수업에 필요한 시설과 공간도 부족했고, 선생님도 모자랐습니다. 음악선생님이 가정수업을 하시고 체육시간에는 교구따위 없이 1년 내내 운동장 돌만 주웠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민원이나 치맛바람이 없었던 게 의아할 정도입니다.
새로 지은 건물이라 좋기만 할 줄 알았는데 불편하기만 했지만 지역 최초 남녀공학답게 교실 안은 남녀합반이었습니다. 막 사춘기가 시작되는 아이들이 쭈뼛쭈뼛 한 교실에 모여 생활하는 모습이 어땠을까요? 다른 친구들은 다 남녀가 분리되어 공부하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때가 아마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일거에요. 상상이 잘 안되죠?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렇듯, 교실에서도 금방 서로서로 친해졌습니다. 낯설어하던 아이들도 조심스러워하던 아이들도 스스럼없이 같은 반 친구들로 서로의 성별을 의식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습니다. 그리고 여름이 지나갈 무렵, 학교 안에 작은 유행이 시작됐습니다. 바로 누군가를 마음에 두는 아이들이 생겨난 거죠. 고백이라거나 커플은 그때는 생각도 못 했고요, 그저 누가 누구를 좋아한대, 나 사실 쟤 좋아해, 하는 아이들끼리의 소곤거림이 번지는 정도였어요. 한 반에 대여섯 명 정도의 여자아이들이 같은 반 남자애들을 좋아한다며 얼굴을 붉히고 비밀스럽게 얘기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신기했어요. 뭐가 좋다는 걸까? 좋아한다는 마음은 어떤 거지? 어떻게 좋아하게 되는 걸까? 알 수 없는 일 투성이 었습니다. 이성을 좋아하는 마음 자체가 제게는 미지의 세계였거든요. 동시에 나도 여자아이들의 비밀회합에 끼고 싶었습니다. 나만 소외되고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 누구라도 좋아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도 아니고 불현듯 각성한 초능력자도 아니면서, 저는 결심했습니다. 때가 되었다. 나도 누군가를 좋아해야겠다! 그게 남녀공학 합반에서 공부하고 있는 나에게 주어진 당연한 우주의 질서이며 사춘기에 접어든 나의 인간으로서의 의무다! 하고 말이죠. 조용한 수업 시간, 교실 앞의 칠판과 선생님을 지나 포커싱이 맞춰지는 영화의 한 장면인듯 내 시선과 의식이 앞자리에 앉은 남자아이의 뒤통수로 모아 졌습니다. 그래, 너다.
그날 그 수업 시간부터 저는 그 아이를 좋아하기로 했습니다. 희망의 싹들은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쉬는 시간에, 점심시간에, 저는 자꾸 그 아이를 쳐다보고 기회가 생기면 툭툭 말을 걸었습니다. 비밀회합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진짜 좋아하는 건 아니고, 좋아하기로 결심하고 낙점한 아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저는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두근거렸습니다. 좋아하겠다고 정한 나의 의지와 결단력 때문인지 애초에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 아이로 찜했던 건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때 고작 열네 살 이었으니까요.
이름은 잊었지만, 아직 그 아이 얼굴은 선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짧게 깎은 스포츠 머리, 햇볕에 보기 좋게 그을린 도톰한 뺨과 입술, 쌍꺼풀 없이 둥그런 이마와 눈매, 변성기가 시작되려는 듯 적당히 낮은 목소리와 쑥스럽게 웃던 선한 표정……. 성적도 그럭저럭 좋아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가 막히던 수학 문제 풀이를 도와주기도 했고 수업 시간에 발표도 곧잘 했더랬지요. 그 아이는 제 마음을 알았을까요? 저는 그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의 정체를 깨달았을까요?
제 마음을 더 키워나가기 전에 겨울이 되었고, 2학년부터는 아이들의 이성 교제에 민감했던 선생님들이 공부를 핑계로 남녀분반을 해버리는 바람에 그 아이와는 말 한마디 더 못 해보고 끝이 났습니다. 사실 끝이라고 말할 수도 없군요.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는 법인데, 시작조차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이게 정말 다였습니다. 제 풋사랑 이야기는.
아, 시시하다구요? 어쩔 수 없잖아요. 풋사랑이 다 그렇죠. 적당히 시시하고 적당히 미지근해야 다음에 뜨겁고 미칠 것 같은 사랑도 하게 되는 법 아닐까요? 죽어버릴 것 같고, 죽여버릴 것 같은 사랑 이야기는 또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희망의 싹들은 어디에나 있다고.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비오는 날 풋사랑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