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거리 연탄가게' 정류장을 지나 종점 '개미마을' 정류장에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면 산뜻한 공기가 코끝에 맴돈다. 이곳이 서울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30년 전쯤으로 돌아간 것만 같다.
서울의 마지막 남은 달동네. 다들 개미처럼 부지런히 산다 해서 '개미마을'이라는 이름을 가진,6.25 전쟁 때 피란민들로 하여금 만들어진 마을이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의 대다수가 60년대에 지어졌다.
풍성하게 자란 배추들, 그리고 그 너머 보이는 쌓아놓은 연탄들. 수도와 전기공급이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도시가스도 들어오지 않아 아직도 연탄을 쓴다고. 버스 정류장 종점에 있는 공중화장실도 주민들을 위한 곳이라고들었다.
관광객의 시선에는 평화롭고 아름답다만, 각자의 삶을 섣불리 단언하기엔 조심스러운 게사실이다.
지금 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달라는 말도 못 하겠다. 왜 사람들은 본인 동네는 재개발되고 역이 들어오길 바라면서, 낡은 달동네는 보존해달라고 하는가.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곳이다. 개미마을은 원래 군사시설보호구역, 인왕산 도시자연공원구역으로 중복 지정되어 있었다. 2006년 개발제한구역 해제되고 자연녹지지역으로 유지되었다. 이어 2008년 제1종 일반주거지역으로 변경되어 관리되고 있다. 2009년 지구단위계획 수립 전후로 지분 수가 늘어났다. 서울연구원에 의하면 1985년 지분 소유자는 185명이었으나, 2021년에는 367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에 다수 권리자로 거주민의 이전, 개발 등은 많이 어려우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곳이기에 그전에 꼭 와보고 싶었다.
동네 구석마다 마을을 스케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냇가에도, 골목에도, 계단 귀퉁이에도 스케치를 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이곳에 놀러 온 사람들은 카메라에 담지 않고 온종일 연필로, 물감으로 채색해가며 이곳을 기억하려는 것 같았다.
다들 본인의 시간과 시각으로 마을을 담고 있었다. 그 마음을 알았던 걸까. 길가던 고양이도 본인이 모델임을 알고 포즈를 취한다.
서울에서 무청시래기를 말리는 곳 찾기 힘든데.
세상이 급변하는 것들로 버무려진 지 오랜데 이렇게 오랜 세월을 본인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있을까.
참 정겨운 동네다. 고양이들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먼저 다가오다니.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가다가 인왕산 산책로로 잘못 들었다. 뭐 어떠랴. 이제 인왕산 호랑이도 없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을 따라 흙길을 밟았다.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 지나가는 분께 이 꽃이 뭔지 여쭤봤다. 그분은 본인도 몰라 미안하다고 했다.
개미마을에서 흙길을 따라 어느 초등학교 아래에 있던 근린공원 쪽으로 하산했다. 홍제천이 이어진다.
내부순환도로 밑에는 북한산 둘레길이라는 산책로가 있었다.
걷다 보니 꽃들로 수놓은 옥천암이라는 작은 절이 있었다.
이 불상은 '보도각 백불'이라고 불리고, 정식 문화재 지정 명칭은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이란다. 백불인 이유는 조개껍데기를 빻아 만든 흰 원료로 칠했기 때문이라고. 조선시대부터 수많은 여인들이 기도를 올렸던 곳이다.
지금은 누각과 앞의 데크, 울타리로 가려졌지만 개천에 있는 백불의 위엄은 1925년에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이 백불을 보고 그린 그림에서더 잘 나타난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여기에서 기도를 올렸다는 이야기,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옥천암을 요새로 삼아 배수진을 쳤다는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가 내려져 온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은 공짜 일리 없지. 아름다운 꽃길은 '꽃 공양'이 만들었다. 가족 복을 비는 경우 5만 원, 개인은 1만 원.
사마귀도 들러 기도를 비는 영험한 옥천암
앞의 개울은 서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물이 맑았다. 물고기도 많았고 철새들도 배불리 사냥을 한 뒤 여유롭게 낮잠을 즐기고 있다.
다시 돌아가는 길. 홍제천을 걷다 보면 포방터 시장 앞에 내 최애 빵집이 나온다.
'에브리 코너 바이트'는 오픈한 지 몇 개월이 되지 않은 베이커리 겸 카페이다. '우스 블랑'에서 오랜 기간 일 하셨던 분께서 차린 곳인데 빵이 정말 맛있다.
오픈했을 때는 주말마다 차를 타고 와서 빵을 사 갔던 재미에 살았던 적도 있다. 바게트와 소시지 바게트를 좋아한다.
굿즈들도 예쁘다.
점심으로 빵과 커피를 먹을까 하다가 오늘은 새로운 걸 먹어보자며 길을 걸었다. 인왕시장 근처에도 먹을 것이 많기 때문.
그러다가 지도에 등록해두었던 '문화촌 초밥집'이 생각났다. 브레이크 타임 30분 전에 겨우 도착했는데도 웨이팅이 있을 만큼 사람이 많았다.
1만 7천 원짜리 '화'세트를 시켰는데, 재방문 의사 0%. 비추 x 100%
질어서 젓가락으로 뜨기도 힘든 밥알, 불친절함, 횟감도 그냥저냥, 먹을만한 것은계란초밥이었다.
처음에는 괜찮았던 집이 변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느 대학가에 있는 저렴한 초밥집보다 나은 점이 없었다. 물가가 급등해서 그런 걸까?
걷다 보니 여행의 출발점이던 홍제역 인근 유진맨숀(유진상가)에 도착했다.
유진맨숀은 지금의 성수 트리마제처럼, 1970년대 당시에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로 인기를 끌었던 곳이다. 고위 공무원, 군인, 연예인, 내로라하는 기업인들이 살았다.
원래 직사각형으로 길쭉한 A동과 B동의 쌍둥이 건물이었는데, 1990년도에 들어 내부순환도로가 가로질러야 한다는 이유로 한쪽의 건물이 절반이 잘려나갔다.
70년대에는 멋진 아파트였지만 사실, 이 건물은 폭파되기 위해 태어난 운명이었다. 청과물시장이 즐비한 필로티 구조로 이뤄진 공간은 전쟁이 나면 탱크들이 숨어 있도록 만들어졌다. 유사시에는 이 필로티를 폭약으로 폭파해 무너뜨려 북한군의 서울 진입을 막는 용도로 쓰일 예정이었다.
유진상가 건설 직전인 1968년엔 청와대 인근까지 침입해 총격전을 벌인 '김신조 사건'이 있었다. 유진상가는 구파발에서 서울 시내로 들어오는 통일로와, 청와대로 향하는 세검정로의 교차로라는 군사적 요충지에 세워질 건물이었고,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군사적 목적을 담아 설계됐다. 이 건물이 폭파되었다면 청와대로 가는 세검정로의 진입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탄생의 근원과 다르게, 유진상가는 아파트로, 상업시설로 50년간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왔다. 몇 년 전에는 건물 지하에 숨겨진 공간들이 발견되어 미술관으로 조성되었다.
유진맨숀 위층으로 가는 입구를 못 찾아서 빙 둘러만 보고 걸음을 옮겼다.
유진맨숀에서 약 10분 정도 걸으면 도착하는 '스위스 그랜드 호텔(구 그랜드 힐튼 서울)'
이름을 바꾸고 2020년 개장한 뒤로는 크리스마스에 가봐야 할 곳 중 하나로 인스타그램에서 자주 보이는 곳이다.
오래되었지만 운치 있는 로비가 인상적이다. 건축가의 이름은 다른 것 같은데 남산에 있던 힐튼과 다소 비슷한 점들이 눈에 띈다. 로비 아래층에 있는 카페에서는 피아노 공연이 한창이다.
이곳의 오너는 조선 왕조의 후손이자 친일파의 후손이다. 오너의 5대 선조인 영평군의 사유지였던 '누동궁'을 판 돈으로 지은 호텔이다. '누동궁'은 지금의 핫플 익선동 골목에 있던 큰 궁궐이었다. 지금은 사라졌다.
원래 병원을 지으려고 했다던데 잘 안 풀렸는지 호텔이 들어섰다. 딱 대학병원이 들어서기에 좋은 입지 같다는 생각은 든다만, 그 후로 힐튼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최근 다시 '스위스 그랜드 호텔'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한편, 오너는 이해승의 손자라고 밝혀졌다. 이해승은 전계대원군(철종의 아버지)의 5 세손으로 일제로부터 국권침탈에 기여한 공을 받아 작위를 받았다. 실제 2007년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지정됐다. 이후 정부가 친일파 이해승이 소유한 서대문구 홍은동 땅을 국고로 환수하려고 소송했지만 연이어 패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