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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주용 JulieSim Jul 25. 2016

소소한 일상을 살아 보는 게으른 여행, in 리스본

세계일주 가려고 퇴사한 28살 여자 이야기: 포르투갈

샌프란시스코와 묘하게 닮아 더욱 흠뻑 빠져버린 매혹적인 도시,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2주를 보냈다. 리스본에서는 그동안 그토록 원했지만 늘 짧은 일정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여행, ‘소소한 일상을 살아 보는 게으른 여행’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포르투갈 친구 메나 집은 시내와 한참 떨어진 주거 지역에 위치해 있다. 에어베드가 있는 방 한 칸에 내 전 재산인 배낭 두 개를 풀어놓고, 한 동안 그녀에게 신세를 진다.

‘내일의 일정’ 같은 것은 없으므로 모처럼 알람도 맞춰 놓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다.      


아침이 되면 리스본 특유의 강렬한 햇살이 창문 가득 들어온다. 그 햇살로 얼굴을 얼마나 시커멓게 태우다가 잠에서 깰지는 순전히 내 몸에게 선택권을 주기로 한다.     

일찍 눈이 떠진 날에는 출근하는 친구를 배웅하고, 여유롭게 소박한 포르투갈식 아침상을 차린다. 

샐러드볼에 신선한 토마토와 아보카도를 송송 썰고, 양상추를 와삭와삭 찢고, 강판에 당근을 삭삭 갈아 넣은 뒤, 올리브를 몇 알 떨어뜨린다. 그 위에 소금과 발사믹 식초를 뿌리고, 올리브 오일을 붓고, 오레가노(허브의 일종)를 솔솔 뿌려 오물조물 버무린다. 구멍이 숭숭 뚫린 질긴 바게트 빵을 두 조각 잘라 노릇노릇 구워 버터를 바르고, 오렌지 즙을 짜 주스를 만들고, 비카(포르투갈식 에스프레소)도 한 잔 내린다. 

그리고 창밖을 보며 매우 천천히 아침을 먹는다.     

파스텔 톤 페인트가 군데군데 칠해져 있는 빛바랜 흰 벽에 빨간 지붕을 얹은 건물들, 발코니마다 널려 있는 빨래, 한 손에 신문을 들고 출근하는 아저씨, 자전거를 타고 선글라스를 낀 채 어디론가 향하는 청년.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포르투갈 그림엽서에 등장할 만한 드라마틱한 한 컷은 아닐지라도, 내겐 그 어떤 모습보다 ‘포르투갈스럽’고, 정겹다.  

때로는 조깅을 하기도 하고, 혹시나 한국 향신료를 살 수 있는 곳이 있을까 하며 골목 구석구석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친구가 키우는 고양이 니나와 놀다가 함께 늘어지게 낮잠을 자기도 하고, 9시쯤 지는 석양을 보러 느지막이 저녁을 먹고 물가에 가서 하염없이 앉아 있다가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다가 조금 심심해지면 마을버스를 타고, 또 지하철을 갈아타서 시내에 간다. 카메라를 든 관광객들과 함께 ‘산타 주스타 엘리베이터’ 앞에서 셀카를 찍고, 줄 서서 에그 타르트를 먹고, H&M에서 5유로짜리 티셔츠를 사고, 코르크로 만든 기념품도 고른다. 그리고 초밥을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일식당에 들러 캘리포니아 롤 한 박스를 테이크아웃 한 뒤, 다시 지하철을 타고, 마을버스를 갈아타서 집에 돌아온다.     

주말이면 관광객의 본분을 잊지 않고 크로스백을 몸에 바짝 붙여 메고, 카메라를 목에 건 채, 가장 태양이 작열할 시간에, 가장 사람이 북적이는 곳으로 가서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댄다. 화장실 건물에조차 탄성을 내지르게 될 만큼 아름다운 리스본 풍경들에 내 모습을 함께 담아 보고자, 다른 곳에서는 차마 부끄러워 시도하지 못했던 포즈도 시도해 본다.      

화장실 건물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세상의 끝, 호카곶
어디나 함께 하는 내 여행 친구 며캣 :)

우리네 시청 앞 광장과 같은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포르투갈 국기로 치장한 사람들과 함께 유로 리그 2016 결승전을 본다. 포르투갈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며 프랑스와 평생 원수진 일도 없거늘, 오늘만은 포르투갈 사람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호날두를 응원하면서 진심으로 그들의 승리를 축하해 준다.       

때로는 일 나간 친구 대신, 우렁 각시처럼 집안일을 한다.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창 밖에 있는 빨랫줄에 속옷을 널다가, 지나가는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쳐 민망함에 배시시 웃어 보이기도 한다. 잠옷 차림으로 장을 봐 와서 저녁을 지어 놓고,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보면서 친구를 기다린다.      


호카곶 칼바람에 날아가 알이 쏙 빠져버린 선글라스를 고치러 동네 안경점에 갔다가, 한국인을 처음 본다며 신기해하는 아저씨와 포르투갈 국민 아이스크림 'OLA'를 먹으며 한참 동안 수다를 떨다가 나온다.     


옆 블록에 있는 구멍가게에 치약을 사러 갔다가, 빠알간 자태에 그만 침이 고여 수박 반 덩이를 사서 돌아오기도 한다. 계산 후 “오브리가~도(감사합니다.)”하는 아가씨에게 “오브리가~도”를 수줍게 내뱉고 나오면서 왠지 몽글몽글 행복해진다.     


“꼭 요란한 사건만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이 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운명이 결정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삶에 완전히 새로운 빛을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일어난다. 그 놀라운 고요함 속엔 고결함이 있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     


편도 티켓만 끊어 돌아다니는 자유로운 여행자라고 해도 언제 어디서나 이렇게 게으른 여행을 할 기회가 주어지는 건 아닐 터이다. 그러므로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좋아. 다른 나라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도 이 곳은 너의 방이야.”라는 친절한 친구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염치없게도 정말로 다시 돌아와 또 한 번 게으르게 지내보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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