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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주용 JulieSim May 31. 2016

세계일주 D-0: 퇴사 후 세계일주 출발까지

세계일주 가려고 퇴사한 28살 여자의 이야기

퇴사 후 딱 두 달 뒤인 오늘, 세계일주 첫 여행지인 남아공에 도달하기 위한 첫 경유지, 홍콩에 와 있다. 앞으로 6시간의 대기와 13시간의 비행, 또 3시간의 대기와 2시간의 비행이 더 남아 있기에, 큰 맘먹고 만든 PP카드 덕에 처음 입장해보는 이 곳 홍콩 라운지에서 퇴사 후 두 달을 정리해 보려 한다. 

드디어 세계일주 시작!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퇴사 직후 나는 오히려 회사에 다닐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보냈다. 세계일주 중에 해 보고 싶은 작은 프로젝트(?)가 있었고, “어디 어디 가? 언제 돌아와? 예상 경비는 얼마야? 나 이때 휴가 써서 여행 가려하는데 너 그때 어느 나라에 있을 거야?”와 같은 지인들의 질문에 모두 대답해주고 싶은 욕심도 있었기 때문이다.      


온갖 자료를 찾아가며 시트가 수 십 장이나 되는 엑셀, 파워포인트 파일을 정신없이 만들다가 문득 아차 싶었다.

‘아니, 내가 이렇게 또 엑셀, 파워포인트랑 씨름하려고 회사를 나온 건 아니잖아?’

회사도 사업계획서대로 굴러가기 힘든 법인데 하물며 장기 여행이야 오죽하랴, ‘세계일주 계획서’란 것을 작성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곧바로 엑셀을 꺼 버리고, 그동안 낮 시간을 이용할 수 없는 직장인이라 차일피일 미뤄왔던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온갖 병원에 다녔다. 

하루는 장티푸스, 파상풍 등의 예방접종을 한꺼번에 다섯 방 맞고, 그 다음날은 사랑니를 빼고, 그 다음날은 안과에 가서 검진을 받았다가, 다음날은 초음파를 찍고, 또 치과에 갔다가, 광견병 2차 예방주사를 맞고, 조직검사를 받는 등의 나날들이었다. 어느 병원이든 ‘3일 이상 금주’를 명했는데, 나는 거의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에 갔기에 술 한 모금을 입에 대지 못했다.     


온갖 은행을 방문했다.

여기저기 잠자고 있던 돈을 10원까지 긁어모아 여행경비로 충당하고, 안 쓰는 통장을 정리하고, 적금 상태와 퇴직금을 확인했다. 피 같은 돈을 해외에서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수수료를 연구해가며 각종 카드를 발급받았다. 그 과정에서 공인인증서 암호만 한 백 번은 입력한 것 같다. 


본격적으로 짐을 쌌다.

옷을 좋아하는 내게 있어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바캉스 잇템 하늘하늘 여신 원피스’를 뒤로 하고 아무렇게나 구겨도 괜찮으면서 초고속으로 마르는 초경량 스포츠웨어를 검색하는 것이나, ‘트렌디 태슬 토트백’ 대신 도난 방지 전문 가방과 와이어, 자물쇠, 복대를 고르는 것은 생각보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 

배낭은 ‘가져가고 싶은 걸 넣기엔 너무 작지만 내가 매기엔 너무 무거운’ 애물단지 같은 존재였으며, 예쁘지도 않은 반팔티셔츠 하나 넣을 공간이 없어 수십 번 배낭을 풀었다가 쌌다가 하는 사이 손은 이미 떠나기도 전에 거칠거칠해졌다.

     

2년이나 고민하며 굳혔던 결심임에도, 한 번쯤은 광견병 예방주사를 맞다 말고 왠지 서러워져 엉엉 울어 버리거나, 은행에서 현금카드를 만들다 말고 뭐가 이리 복잡하냐며 머리를 쥐어뜯어 버리거나, 더 이상 개미새끼 한 마리도 못 들어갈 것처럼 빵빵한 배낭에 건조 김치 한 봉지를 구겨 넣다 말고 괴성을 지르며 배낭을 걷어차 버리고 싶기도 했다.  

   

여행 중 나를 소개할 때 건넬 여행자 명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다.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냐는 말에 “도난 방지 가방, 액션캠, 호신용 후추 스프레이, 의류 파우치 등이 갖고 싶긴 한데~”라며 기다렸다는 듯 구체적인 아이템을 읊어댈 수 있었던 적이 살면서 몇 번이나 있었던가? 

내 인생에서 내가 원하는 걸 이토록 명확히 알고, 요청하고, 준비하고, 몰두한 적이 과연 얼마나 있었던가?

그 질문에 ‘지금’이라고 답할 수 있어서 눈물 나게 행복했다. 

    

네가 꿈을 꾸지 않는 한, 꿈은 절대 시작되지 않는단다.
언제나 출발은 바로 '지금, 여기'야. 
너무나 많은 사람이 적당한 때와 적당한 곳을 기다리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핑> 중-     


인간의 기억은 과거의 일일수록 더 아름답게 윤색해서 기억한다고 하죠. 그거야말로 우리가 더 많이 여행하고 더 많이 경험해야 하는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지금 어떤 일을 겪던지 우리 뇌는 더 환상적으로 기억해줄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면 우리가 지금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기억할 거리가 전혀 없는, 반복적인, 그야말로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팟캐스트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중-     


내가 원하는 걸 이루는 방법은 그걸 할 수 있는 장소에 가서, 그걸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거예요. 그러면 상상하지도 못했던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바시 오현호 씨 강의 중- 

    

PP카드 덕에 처음 들어와 본 공항 라운지


케이프타운에 도착하면, 트럭을 타고 다니며 남부 아프리카의 대자연을 40여 일 동안 만끽하려 한다. 

그다음은 잘 모르겠다. 

꿈처럼 시작된 이 여행이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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