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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빈 May 05. 2019

유학, 고생길의 시작

집 나가면 개고생 한다더니



3년 전,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를 꿈꾸며 유학 준비를 시작했었다. 삶의 모토가 '선택과 집중'인지라 다니던 회사도 전부 그만두고 석사 유학 준비에 올인을 하였다. 그렇게 안 했으면 아마 지금도 한국에서 계속 머물며 먼 상상 속 이야기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나에게 유학 준비 기간은 6-7개월 정도 걸렸었다. 원서접수기간에 맞게 타이트하게 준비기간을 소화했었다. 이 기간 동안 나의 발목을 계속 잡았던 녀석은 포트폴리오가 아닌 '어학시험'이었다. 평범한 인문계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어시험이라고는 수능과 토익이 전부였으며, 어학연수나 해외에서 산 경험이 없었던지라 쉽지 않은 장애물이었다. 여차저차 턱걸이로 어학시험에 합격하고 포트폴리오를 한 달 정도 준비한 뒤에 원서접수를 하였다. 


원서접수가 끝난 뒤 최종 결과 발표까지 2개월 정도의 시간이 어중간하게 남아있었다. 지원한 학교는 오직 알토대학 한 군데였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는 유학을 가거나, 못 가거나로 극명하게 나뉘었었다. 2개월이라는 시간이 굉장히 길게 느껴졌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굉장히 애매한 시간이었고 친구들을 만나도 본인들이 일하는 얘기들만 하느라 대화에 들어갈 틈도 없었다. 어느새 2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학교로부터 메일 한 통이 날아왔다. 합격자 리스트가 떴으니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확인해 보란 거였다. 담담히 열어보니 리스트 안에 내 이름이 있었다. 


당분간 못 볼 친구들과 가족 친지들을 만나러 바쁘게 다녔고 시간이 금방 지나 어느새 출국 당일이 되었다. 핀란드에 가면 굉장히 추울 거라는 지인의 말을 듣고 무거운 옷들과 신발, 난방용품, 밥솥 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비행기에 올랐다. 10시간 정도의 비행시간 후 드디어 핀란드 공항에 도착하였다. 피곤하고 짐으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핸드폰에 적어놓았던 해야 할 일 체크리스트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출국장을 나왔다. 공항에서 해야 할 일에는 교통권 구입과 유심칩 구입이었다. 생전 외국 인하고 많은 대화를 해보지도 못했고, 피곤해서 잘 돌아가지도 않는 뇌를 쥐어짜가며 긴장한 채 서툰 영어로 여차저차 교통권과 유심칩을 구입하였다.


처음 온 이민자들에겐 낯설고 어려운 도시 헬싱키


공항에서 숙소까지 가는 택시 안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에는 너무나도 낯설었던 헬싱키의 풍경들이 살짝 두렵기까지 했었다. 새로운 삶에 대한 부푼 기대가 아닌, 이곳에서 앞으로 혼자서 살아남아야 된다는 생존본능이 꾸역꾸역 올라왔다. 아무런 친구, 가족, 아는 사람 없는, 완전히 리셋된 삶의 시작이었다. 그 느낌은 편안하게 해외를 여행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정말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며칠 뒤 미리 신청한 핀란드 학생회(HOAS)에서 제공하는 아파트의 집 키를 받고 처음으로 살게 될 집을 찾아갔다. 미드에서나 보던 셰어 아파트였다. 개인방이 각자 존재하고 화장실과 주방을 공용으로 쓰는 방식이다. 처음 보는 핀란드 룸메이트와 어색하게 첫인사를 했다. 혹시나 깐깐하거나 성격이 좋지 않은 룸메이트와 만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말이 많고 유쾌한 친구라서 마음의 부담을 조금 덜 수 있었다. 그렇게 한국에서부터 가져왔던 무거운 짐들을 전부 방에 옮기고 나서 맨바닥에 누워 크게 한숨을 쉴 수 있었다. 


핀란드 대부분의 학생 아파트는 unfurnished, 즉 가구가 아예 없는 아파트들이다. 다행히 옷을 넣을 수 있는 붙박이장은 방마다 하나씩 있었다. 하지만 조명조차 없고 오직 새하얀 흰색 벽에 붙박이장 하나가 전부이다. 학생 아파트로 옮긴 첫날밤, 핸드폰 조명에 의존하며 맨바닥에 누워 옷가지만 덮은 채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앞으로 살면서 필요로 하게 될 물품들을 사러 이케아로 향하였다. 이케아에 도착하자 또다시 혼돈이 오기 시작했다. 영어는 한마디도 안 써져있고 오직 핀란드어와 스웨덴어로만 모든 것이 적혀있었다. 여차저차 필요한 책장, 책상, 의자, 주방도구, 그릇, 컵, 욕실용품, 매트리스, 배게, 이불, 조명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품들을 무거운 카트에 한꺼번에 바리바리 담아서 계산대에 가서 계산을 하였다. 내 기억에는 거의 100만 원 정도 나왔던 것 같다. 워낙 짐이 많기 때문에 딜리버리 서비스를 이용하였다. 그러다 보니 산 물품이 바로 오지 않고 며칠 뒤에 도착을 하였다. 배달 온 가구들을 전부다 조립하고 나니 조금은 사람 사는 집처럼 변했다.


막막하고 단촐했던 시작


다음으로 할 일은 이민청에 가서 전입신고를 하는 일이었다. 이민청 건물에 들어가면서도 조금씩 두려움이 앞섰다. 영어를 못 알아들으면 어떻게 해야 될지, 어디에 가서 어떻게 접수 신청을 해야 되는지. 들어가 보니 수많은 다양한 인종의 이민자들이 뒤엉켜서 어디서 신청해야 되는지, 접수처 줄이 어딘지 아무것도 감이 안 잡힐 만큼 혼돈 그 자체였다. 여차저차 잘못된 줄에 섰다가 다시 다른 줄로 이동하고, 접수서류를 받아 든 뒤 필요한 내용들을 적고 모르는 단어들을 핸드폰 사전으로 찾아가면서 양식을 채웠다. 몇 시간이 흘러서야 제출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다음은 이곳에서 생활하기 위해 필요한 은행계좌를 개설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해외 은행에 처음 들어가 짧은 영어를 더듬거려 은행계좌를 개설해야 된다 설명하고 몇 분을 기다린 후 차례가 돌아왔다. 직원에게 나는 학생이고 계좌가 필요하다고 말한 뒤에 계좌를 계설 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들에 대답하느라 진땀을 뺐다. 못 알아듣는 내용들을 몇 번이고 다시 물어보고 엉성하게 대답하기를 몇 차례 반복한 후에 드디어 계좌를 개설하였다. 


이렇게 해서 외국에 살기 위해 기초적으로 필요한 일들을 마무리 지었다. 그 당시 너무나도 부족했던 영어실력 때문에 공적인 업무를 볼 때 굉장히 진땀을 뺐다. 유학이 뭐 별거 있겠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 이전에 해외에서 정착해서 외국인으로서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고 준비도 쉽지 않았다. 이미 충분한 언어 실력을 갖춘 분들이라면 큰 어려움 없이 처리했을 것들이지만 언어가 내게 가져다주는 부담감이란 정말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아직 학교생활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다. 하지만 진짜 학교생활에 비하면 이건 별것도 아닌 일들이었다.


과거 알토대학교 Art&Design 대학 건물 아라비아. 현재는 오타니에미 캠퍼스로 모든 시설이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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