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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샤갈 특별전, Beyond Time

~9월 21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by 윌마

http://www.newswell.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511


샤갈은 떠나야 했다. 무엇을 하겠다는 명확한 계획을 세워서가 아니었다. 무엇을 하고자 하면 지금 이곳은 갇힌 공간이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마르크 샤갈(1887~1985)은 비테프스크라는 도시의 유대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동유럽의 유대인 마을은 작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유대인은 러시아 공립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고, 유대인 거주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러시아 서부 국경지대에 살던 수많은 유대인을 통제하기 위해 유대인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유대인이 이 구역 밖으로 나가려면 허가를 받아야 했다.


샤갈이 제일 좋아하는 과목은 선, 각, 세모, 네모를 다루는 기하였다. 또 그림 그리는 시간이면 왕이 된 기분이었다. 공립도서관에서 삽화가 많은 잡지를 빌려와 따라서 그렸다. 점차 집안의 벽은 온통 그림으로 채워졌다. 기껏해야 취미 활동이었던 그림 그리기였지만,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은 샤갈이 그린 그림에 감탄했고, 샤갈을 ‘진짜 화가’라고 불렀다. 일신교를 추구하던 유대 사회에서 예술이란 주로 신을 찬미하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인간이나 예술 그 자체를 추구하는 예술은 우상을 숭배한다는 의혹의 눈초리를 받았다. 샤갈이 속한 유대 공동체는 다른 보수적인 곳보다 화가를 배척하는 분위기는 덜했지만, 어떤 삼촌은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로 샤갈의 손을 잡는 것조차 꺼렸다. 현실적인 이유로 엄마 역시 샤갈이 사무원이 되길 원했다. 샤갈은 떠나야 했다.


비단 샤갈만이 아니었다. 유대인 거주지는 초라하고 자급적이고 반농촌적인 생활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막상 유대인 마을을 벗어나면 반(反) 유대주의에 시달렸다. 비극적인 현실은 수많은 유대인이 서유럽과 멀게는 미국으로 이주하게 했다. 유대 사회 역시 정치적·사회적으로 점차 해방되었고 세속화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샤갈은 부와 명예를 꿈꿨다. 샤갈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물건을 배달하러 가는 것처럼 꾸미고 새로운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향해 출발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최초로 서구화된 도시로, 1918년 모스크바가 수도가 되기 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어렵게 등록한 미술학교에서 샤갈은 러시아의 전통문화와 서구의 현대적인 사조들을 접할 수 있었다. 러시아 화가의 작품은 젊은 샤갈에게 러시아 민속에서 이국적인 동유럽적 요소들을 활용한 색채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해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샤갈은 폴 세잔, 에두아르 마네, 클로드 모네, 앙리 마티스 등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 ‘파리’라는 이름조차 모르던 때에 예술의 신세계를 본 격이었다. 그들이 활동하는 파리에는 예술의 자유와 신분의 자유가 있다는 생각이 미치자, 샤갈의 마음은 다시 파리로 떠날 궁리로 가득 찼다.


샤갈이 파리에 왔을 무렵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운동은 입체주의(Cubism)였다.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 등 입체파 작가들은 대상을 단순화하고, 르네상스 이래의 단일하고 고정된 시점이 아닌 복수의 시점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입체주의에 앞서 파리 예술계를 지배한 것은 야수파(Fauvism)였다.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활동한 앙리 마티스와 모리스 블라맹크가 대표적 야수파 화가로,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아 강렬한 원색과 격렬한 붓놀림을 통한 거친 형태를 특징으로 대중에게 충격을 던졌다.


샤갈의 예술적 재능은 파리에 와서 꽃을 피웠다. 샤갈은 최신의 아방가르드 회화 운동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그 특성들을 흡수하여 자신의 의도에 맞게 응용했다. 샤갈은 이러한 영향을 부정했지만, 샤갈이 파리에서 그린 초기 작품들을 보면 야수파와 입체주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파리가 샤갈에게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자신을 옭매던 사회적 종교적 제약에서 벗어난 점이다. 그전까지 실험적인 수준에 그쳤던 관능미를 파리에서는 강렬하게 표현하기 시작했다. 샤갈의 그림에 나오는 하늘을 나는 소와 염소는 그의 발명품이 아니다. 샤갈이 자라난 환경에서 나온 날아다니는 짐승은 족쇄를 끊으려는 그의 욕망을 상징한다. 궁극적으로 자유를 얻기 위한 수단이다. 샤갈에게 파리의 빛은 자유의 빛이었다.



그동안 샤갈은 한사코 떠나왔다. 떠나왔던 것은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떠나왔고, 그래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삶에는 결코 떠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러시아의 전통적인 유대 마을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그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았고, 평생 샤갈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샤갈이 화폭마다 펼쳐 낸 마법 같은 세계, 비테프스크 마을과 지붕 풍경, 부유하는 연인들, 말을 건네는 동물들, 지붕 위의 바이올리니스트, 성서 속 인물들은 시간을 역류하여 현재의 샤갈에게 돌아왔다. 샤갈의 그림은 결코 실제 풍경으로 존재할 수 없지만, 감정의 진실이 현실의 논리를 넘어서서 선명하게 빛을 발한다. 사실을 넘어선 진실과 만나는 순간이다.


샤갈은 평생 유대 화가라는 낙인을 거부했다. 파리에서 활동하는 보편적 화가로 비치기를 바랐다.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등 다양한 사조에서 샤갈을 범주화하고 평가하려고 했다. 샤갈은 그 모든 범주화를 거부했다. 자신의 그림은 그동안 걸어온 길에서 나온 특수한 것이었다. 자신은 눈앞에 있는 현실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것을 그리고자 했다. 기억과 사랑 같은 삶의 주제들을 매번 새로운 색과 감정으로 캔버스에 자유롭게 엮어냈다. 바로 그 점에서 샤갈의 예술은 누구에게나 전해지는 보편적인 감동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샤갈이 우리 곁을 떠난 지 40년이 지났지만, 그의 상상력은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마르크 샤갈 특별전 : Beyond Time> 전시가 지난 5월 23일부터 9월 21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다. 회화, 드로잉, 석판화, 유화, 스테인드글라스 등 총 17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며, 기억(Memory), 주요 의뢰 작품(Major Commissions), 파리(Paris), 영성(Spirituality), 색채(Colour), 지중해(Mediterranee), 기법(Techniques), 꽃(Flowers) 8개 테마로 구성된다. 미공개 원화 7점이 공개되며, 무엇보다도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 천장화와 예루살렘 하다사 의료 센터의 스테인드 글라스 두 작품이 몰입형 미디어 아트로 재해석된다.


※ 본 글은 <샤갈> (모니카 봄-두첸), 전시 보도자료 및 도록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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