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풍(正風)
극의 첫 장면은 신윤복과 정향의 대면으로시작된다. 갓끈을 푸는 신윤복이 손등의 상처를 부각하는 이유는 정향과 인연을 환기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돌로 손등을 내리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신윤복을 보듬어 준 정향. 그 마음을 받아준 신윤복. 그런 인연 속에 맺어진 이들의 행동이 이 장면에서 과연 어떻게 전개될지 시청자들의 관심을 자극한다. 긴장감은 신윤복의 성(性)이 정향과 일치한 데서 나온다. 극이 긴장의 순간을 맞이할 순간도 없이 들이닥친 도화서 일행으로 인해 산통은 다 깨진다. 속도 조절에 실패한 이유다. 여기서도 연출 속도를 더 압축했으면, 긴장감을 최고조로 몰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다소 느슨한 화면처리로 김 빠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첫 장면에서 클로우즈업의 미학은 극대화된다. 정향의 목선부터 입술, 눈으로 향하는 장면에서는 미세한 눈물의 결정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화면에 꽉 찬 정향의 얼굴과 목선은 그 자체만으로도 묘한 상상력을 자극하게 만든다. 이런 화면 연출은 야심한 밤의 정서를 부채질하지만, 실질적으로 조명의 강도가 낮과 밤을 구분하기는 어려워 효과는 반감된다. 신윤복과 정향이 이별하는 장면에서 극의 전개 속도는 다소 느린 편이다. 지나치게 장면을 부각하다 보니 내용이 감상적으로 흐른다. 정향이 신윤복에게 절을 하는 장면 또한 다소 작위적인 느낌이다. 신윤복과 정향이 있는 방을 습격하는 장면은 돌발적인 상황 전개치고는 지극히 감상적이다. 신윤복의 잘못을 고발하러 온 이들의 태도 또한 순응적이다. 밖에서 분명히 큰 소리로 대화하는데, 마치 방에서 이런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듯 장면이 이어진다. 극 중 시간 흐름에 대한 안배가 부족하고, 연출자가 극본의 묘사에 치중하기 때문이다. 영상의 특성상 극 중 시간은 빨라지기도 하고 느려질 수도 있다. 상식적인 시간의 흐름에 적절하지 않은 연출은 오류로 비칠 수도 있다. 민감한 시청자의 기호를 파악하고, 연출해야 하는 이유다.
김조년과 정향의 합방 장면은 애초부터 큰 기대가 없었다. 가끔 등장하는 이런 신은 한때 드라마에서 공식처럼 사용되기도 했다. 요즘은 드라마에도 관람 등급이 붙는 시대라 이전처럼 의외의 장면을 고대하기는 어렵다. 드라마의 특성상 15세 이상 청소년이 볼 수 있는 내용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 부분에서 김조년이 정향에게 마음이 올 때까지 몸을 탐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뜬금없다. 이는 탐욕적인 캐릭터의 속성과 부합되지 않는 이질성을 보여준다. 다만 대부분의 연령에서 볼 수 있는 드라마 등급이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여, 적절한 스탠스를 취한 것은 아닐까, 싶다.
객관적 상관물은 여러 가지가 등장한다. 노리개와 정향의 잘린 머리카락 뭉치, 정조가 하사한 야광돌이 그런 것이다. 객관적 상관물은 인물에서 다 표현할 수 없는 정조를 물건을 통해 표현해 낸다는 이점이 있다. 이를테면, 노리개는 신윤복을 상징하고, 잘린 머리카락 뭉치는 정향을 상징한다. 이런 상징물의 의미를 파악하면 드라마 내용을 이해하는데 한층 수월하다. 정조가 하사한 야광돌의 특성은 한정된 조건에서만 빛을 발한다. 이런 특성이 정조의 심정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해석한다면, 드라마를 보는 깊이가 달라진다.
이번 회차에서 등장하는 두 편의 그림은 김홍도와 신윤복의 화풍을 확인할 좋은 기회다. 극 속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림 속 풍경을 재해석하여 극의 전개에 활용할 수 있는 놀라운 해석력이 돋보인다. 작가의 상상력과 고뇌의 산물로 해석할 수 있다. 정조가 꽃의 특성을 간파하고 그림이 그려진 시점을 예측하여 관리들의 일탈을 잡아내는 장면은 탁월한 디테일의 승리다. 작가의 이런 세심한 관찰은 미학적 정조를 더욱 고도화시킨다.
<바람의 화원> ‘정풍’에서는 애정 신이 자주 등장한다. 김홍도와 신윤복, 김조년과 정향, 신윤복과 정향의 경우가 그렇다. 여기서는 신윤복의 양성 연기를 두 가지 시점에서 각기 해석하여, 이를 극의 전개 시 알아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이미 시청자들은 신윤복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김홍도의 행동을 통해 늘 긴장감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신윤복이 성(性) 정체성을 들키게 되면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긴장감 속에서 김홍도가 신윤복을 이성으로 인지하는 장면은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이를테면, 술에 취해 누워있는 신윤복을 보고 손끝으로 입술 근처에서 이성임을 직관하는 장면은 미세한 떨림의 정서를 부채질한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경우에는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이성이지만 극에서는 동성 관계로 이해해야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신윤복과 정향의 경우도 그렇다. 실제로는 여성과 여성의 만남이지만 이를 극 중에서는 남성과 여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극의 진행 상 발견할 수 있는 미세한 차이를 감지할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필요 없는 장면은 없다. 영상은 어떤 식으로든 극의 흐름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굿판 장면의 효용성은 여러모로 드러난다. 굿판 장면은 무당이 있고, 무당을 지원하는 연주자들과 굿을 요청하고 여기에 참여한 이들로 구성된다. 첫째, 극 중 우위정이라는 캐릭터를 위기로 빠트리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우위정은 정조의 반대파를 대표하는 우두머리다. 그의 식솔들이 조정에서 금하는 굿판에 다녀왔던 사실이 들통난다. 신윤복의 그림을 통해서다. 이런 상황은 그를 위기로 몰아넣는다. 둘째, 신윤복의 작품인 <월하정인>과 같은 그림의 배경을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돌담사이로 두 여인이 지나가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신윤복의 그림이 탄생할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신윤복의 그림 묘사를 위해 직접적 풍경을 연출한다는 측면이다. 이런 식의 구성으로 한 장면의 효용성은 더욱 극대화된다.
이번 회차에서는 유난히 눈물 흘리는 신이 많다. 다소 감정의 과잉 표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장면 중복은 감정의 발산을 유도하는 측면이 있다. 억지로 재현되는 듯한 느낌을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부조리한 사회를 질타하는 장면은 이번 회차에도 어김없이 나온다. 우의정이라는 캐릭터가 대신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굴욕 당한 원인이 되었던 화공들을 깎아내리는 장면을 보면, 계급 차별을 압축해서 보여준다는 인상을 받는다. 조선시대 당시 도화서 화공들은 소위, 환쟁이 취급을 받았다. 문반과 무반, 소위 양반이 아니었던 계급은 자연스럽게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이런 장면은 화이트칼라 직업군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과 겹친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핵심은 그림을 그리는 두 주인공이다. 이번 회차에서도 두 거장의 그림을 볼 수 있는 장면이 연출된다. 그저 막연히 그림을 감상하는 수준이 아니다.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과 채색되는 과정까지 사실적이다. 마치 김홍도가 살아서 그림을 그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극 중에 등장하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 두 점은 그 대비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김홍도가 그린 그림은 주막을 소재로 한 풍경이고, 신윤복의 그림은 관리들의 사생활을 고발하는 그림이다. 이런 회화적 차이로 볼 때, 신윤복의 그림은 풍속을 통한 풍자화로 평가할 수도 있다. <바람의 화원>은 드라마 속에서 숨겨진 회화의 감식안을 가동해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이다.
이번 회차에서는 다음 극을 위한 복선 장면이 여전히 등장한다. 담장에서 느껴지는 은밀한 정조(情調)는 다음 회차에서 새로운 그림이 탄생하는 장면을 예측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정순왕후의 등장은 새로운 갈등을 암시하는 장면으로 기능한다.
극의 말미에는 정조가 기둥에 꽂힌 화살의 편지를 읽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임금으로서 외척 세력에 의해 왕권이 유린당하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역사적 사실에 픽션을 가미한 내용이 혼합되어 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정조의 위기 상황을 이해하는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 드라마 한 편을 보려면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신윤복의 정체성을 알아야 하고, 정조에 대한 개략적인 역사적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이는 드라마와 시청자 사이에 존재하는 암묵적인 합의다. 드라마를 보기 전, 두 거장의 작품을 미리 감상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화공들을 잡아들이는 장면은 극의 긴장감을 부여한다. 이는 다음 회차에 대한 시청자들의 기대감을 추동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드라마의 속성상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 8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