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화사1
첫 장면은 도화서 화공들이 빨래를 하는 풍경으로 이끈다. 여기서 카메라 무빙은 빨래하는 화공들의 일상을 여러 각도에서 포착하는 방식으로 유용하게 활용된다. 극의 내용으로 보아 도화서 한 화원의 그림이 물의를 일으켜 화공들이 연대책임으로 잡일에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불만을 토로하지만 수용하는 모양새를 보여준다.
이번 회차에서 빨래하는 장면은 다층적 의미를 지닌다. 첫 번째는 도화서 화공들의 부당대우, 두 번째는 김홍도의 <빨래터>, 신윤복의 <계변가화>라는 그림의 배경 화면을 연출하기 위한 목적이다. 다소 뜬금없이 화공들이 빨래를 하는 장면이 나왔던 이유는 이런 작품 복기를 위한 사전 포석으로 보인다.
계곡에서 여러 아낙네들이 빨래하는 장면. 이를 숨어서 보는 김홍도와 신윤복. 장면을 상상하는 신윤복과 자신이 상상 속 주인공이 된 장면이 교차된다. 상상 속 재현 장면은 바로 실제로 김홍도와 신윤복이 그린 그림으로 실체화된다(계변가화, 빨래터). 낮에 빨래터에서 본 풍경을 그리고 있는 김홍도와 신윤복, 각자의 그림을 보며 서로 감탄하는 그들. 비슷한 풍경을 보고 그린 두 편의 그림에 착안하여 작가는 뛰어난 상상력으로 김홍도와 신윤복의 동업 관계를 설정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조는 그의 측근인 도승지 홍국영과의 대화에서 어진을 그리라는 제의를 받는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임금의 정통성을 꾀하려는 비책임을 직감한 정조는 즉시 어진화사를 시행토록 한다. 어진화사란 그리는 화가를 뜻하지만 드라마의 자막에서는 ‘임금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드라마에서도 직책보다는 초상화를 그리는 일 자체를 다룬다.
한편, 도화서 최고 직책인 별제 장벽수의 말을 빌어 어진화사를 뽑는 일에 대해 피력하는 대목이 있다. 여기에서는 선발과정이 공정한 것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정작 화면에서는 술을 접대하고, 금거북이를 보여주며 이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음을 보여준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이 행동의 변화를 일으킬 때는 그에 걸맞은 동기가 있을 때 가능하다. 여기서도 처음에 신윤복은 어진화사에 도전할 의사가 없었지만 논공행상을 한다는 소리에 단청소에서 형을 빼 올 요량으로 도전의지를 불태운다. 이는 신윤복의 형인 신영복 또한 단청소에서 염산으로 추정되는 용액으로 등이 부상당하는 상황에서도 어진화사에 지원하는 신윤복을 돕기 위해 색을 배우려는 의지와 그대로 오버랩된다. 극의 후반부에 신윤복이 신영복의 얼굴을 매만지며 초상화 그리는 연습을 하는 장면에서 이들의 말 없는 대화는 시청자들이 들을 수 있는 방백으로만 처리되어 이심전심으로 서로를 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장면에서는 우리가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촉감의 미학을 보여준다. 신윤복이 인물화를 그리기 위해서 그의 얼굴 주변을 매만지는 장면은 손의 감각이 보여주는 인지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초상화를 가르쳐 달라는 신윤복에게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진지하게 충고한다. 그러자 신윤복은 김홍도 앞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는다.
“배우겠습니다. 배우겠습니다. 스승님. 그러니 가르쳐 주십시오.”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 눈만 있다면 어려운 일도 아니지. 하지만 영혼을 들여다볼 수 없다면 사람을 그린다고 다 초상은 아니지. 너는 할 수 있는 쪽이냐? 아니면 없는 쪽이냐.”
“해내겠습니다. 가르쳐주십시오. 스승님.”
이번 회차에서는 정순왕후(영조의 계비)의 등장으로 다시금 음모의 소굴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1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간 정순왕후의 음모가 피바람을 일으켜 김홍도의 절친이자 신윤복의 아버지인 서징과 부인의 죽음이 여기서 연유함을 알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는 카메라 기법은 빠른 속도의 트릭으로 시청자의 이해도를 향상한다. 특히 영상 톤을 한 단계 다운시켜 색조를 흐리게 하는 방식은 현재와 과거를 대칭시키는 측면에서 유효한 기법으로 볼 수 있다.
드라마에서 새로운 인물의 등장은 극의 상황을 반전시키는데 곧잘 활용된다. 이명기의 등장 또한 그렇다. 어진화사라는 주제로 극이 흘러가는 상황임을 감안할 때, 그림의 절대강자였던 김홍도와 대비되는 인물의 등장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사전정보를 통해 시청자들은 이미 이명기가 김홍도에 필적할 만한 재능을 가진 화가라는 사실을 직관했고, 이를 토대로 그가 등장한 만큼 이제는 그의 인격이나 성격 등을 피력할 이유가 대두되기 마련이다. 소설이 진술이라면 드라마는 보여주기 방식을 따른다. 시전 골목에서 걸어가던 김홍도와 신윤복, 이명기가 대면하는 장면은 단편적이지만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이명기가 말 위에서 내리지도 않고 대화를 하는 장면은 그의 됨됨이를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사람을 걱정하는 김홍도, 말을 걱정하는 이명기를 대비하는 것만으로도 향후 그들의 운명을 예견할 수 있다.
“사람이 중요하냐? 말이 중요하냐?”
여기에서 전기수(조선시대 이야기꾼)로 나오는 이의 삼정(상정, 중정, 하정)과 오악(사람 얼굴의 특징이 되는 다섯 언덕- 이마, 코, 턱끝, 왼쪽광대뼈, 오른쪽광대뼈)은 인물화를 그릴 때 기본으로 삼던 인간 얼굴의 기본 척도가 되는 부분을 가리킨다. 김홍도는 손가락으로 그 위치를 신윤복에게 설명해 주며 초상화 수업을 시작한다. 도화서의 화방에서 김홍도가 초상화를 보여주며 신윤복에게 그 질감을 느끼라고 하는 대목에서 터럭의 감각을 손가락으로 체현하는 신윤복의 모습에서 초상화의 본질을 읽을 수 있다. 시각이 촉각으로 이어지는 공감각적인 전이는 예술의 본질이 감각의 이동과도 관계가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또한 어두운 화방에서 신윤복이 김홍도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장면, 긴 수염이 그려진 초상화를 보다가 문득 미간이 찌푸려지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어 놀라는 장면은 김홍도가 신윤복을 막연한 동성 제자로만 볼 수 없는 상황을 직조하는 퍼즐의 하나로 기능한다.
여기에 소개된 그림은 영화 <관상>에서도 언급되었던 작품이다. 명화는 이렇듯 다양한 매체에서 전유되는 형식으로 그 존재성을 드러낸다.
김홍도가 신윤복과 함께 초상화를 습작하면서 다양한 표정을 짓는 장면에서는 희로애락이 얼굴에서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삼정오악을 나누고 이를 서로의 얼굴에 그리며 낙서를 하는 장면은 드라마 속에서 가끔씩 등장하는 코미디적 요소로 시청자들의 긴장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런 장면이 필요한 것은 극의 긴장감을 해소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한다. 뒤 이은 장면이 다시 심각한 장면으로 이어지는 것은 이런 반전 효과를 누린 치밀한 장치의 소산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첫 어진화사 경합을 위해 줄지어 가는 화공들의 모습은 후일에 벌어질 일들을 위한 포석이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김홍도와 신윤복. 이미 그들은 동반자의 길을 가는 중이다.
☞ 9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