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지배
이 장에서 제임스 앨런은 운명과 자유의지에 대한 견해를 밝힌다. 곧 원인은 자유의지, 운명은 결과로 귀속된다는 논리다.
자유의지는 원인을 일으키는 힘을 나타내며, 운명은 결과에 말려드는 것을 말한다.
한 개개인의 선택은 자유의지에 기초한다. 그런 선택의 결과 또한 감내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제임스 앨런의 생각은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온전히 자신의 생각으로만 가능할까? 인간이 자유의지로 뭔가를 선택한 경우, 그것이 과연 상황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을 상쇄시킬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선택은 자기가 처한 상황의 범위 내에서 가능해진다. 고로 이런 상황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개개인의 의지를 훼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임스 앨런의 이론은 어쩌면 무균질 상태에서 이뤄지는 자연 현상이 실제로는 변수가 가득한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한 측면이라는 점에서 재고해 볼 여지가 있다.
성격은 운명 그 자체이다
제임스 앨런이 성격을 운명 그 자체로 보았을 때 과연 정의는 어떤 식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속에서 녹아있는 철학과 사상을 추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격은 그 개인이 엄청나게 긴 시간 동안 무수한 윤회의 삶을 통해, 질서 정연한 발전의 느린 과정 속에서 쌓아 올린 행위의 축적이다.
제임스 앨런도 성격은 ‘고정된 행동 방식’으로 정의하며 이런 성격을 토대로 한 선택과 판단은 자기 자신의 운명을 이끄는 동력임을 설파한다.
제임스 앨런의 글을 보면 모든 행위의 원인과 결과를 개개인의 부덕의 소치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다. 사회가 완전무결하다면 가능한 주장일 수도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럼에도 그 이론을 추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그런 그의 주장이 합리적인 개연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로 인해 결과에 다다르는 것은 결국 개인의 선택에 의해 좌우된다. 이런 선택을 통해 개인은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수혜자가 되고, 때론 그 선택을 되돌리고자 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가 있다. 하지만 설사 그런 과정이 가능하다고 여기더라도 과연 한두 번의 되돌림으로 보편적인 운명적 행보를 막아낼 수 있는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선뜻 대답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자유의지와 운명과의 관계를 단순히 원인과 결과로 접근하는 제임스 앨런의 방식은 그 자체로서 연계성을 부정할 수 없을 수도 있겠지만 아예 이 관계를 무시하고 별도의 관점에서 이를 다루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운명에 미치는 영향은 인간이 판단할 수 없다. 인간의 판단 또한 정확하지 않고, 때론 예상치 못한 이유 등으로 불합리한 선택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의 불완전한 속성을 간과한 채, 모든 선택이 운명적인 견지에서 합리적으로 귀결된다는 믿음은 새로운 차원의 불신을 낳게 될 뿐이다. 성격을 다루는 방식 또한 그것이 변수로서 자리할 수 없다는 관념은 인간의 변화를 추동하는 환경적 충격에 대한 사전 영향을 인지하지 못한 이유도 있기 때문이다. 고로 고정적으로 여겨지는 인간의 성격 또한 새로운 환경적 요인이 발생하면 달라질 수 있는 것처럼 운명의 궤적 또한 어떤 선택으로 인한 당연한 결괏값이 아니라 때론 예기치 못한 상황적 변수로 인해 변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삶이 자유의지냐 운명이냐 하는 것은 해묵은 논쟁이지만 제임스 앨런은 이를 인과관계로 보았고, 필자는 환경적인 변수로 인한 개개인의 의지 차원에서 삶의 방향성을 진단했던 측면이 크다. 이렇듯 삶과 관련된 주제를 대하는 방식의 차이는 인간의 의식 수준과 관념에 달렸다. 제임스 앨런이라는 영성 분야의 탁월한 구루와 같은 분의 말조차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그 생각과 주장이 틀려서라기보다는 자기 관점에서 이를 재해석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성을 함양하고자 하는 이유도 있다. 때론 이런 성인과도 같은 분들의 생각과 관점도 시대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