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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로운 행복의 비결

by 정작가


제임스 앨런이 이 장에서 말하고 있는 행복의 비결은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부에 대한 통념을 깨트린다. 흔히들 부를 소유하면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갈망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행복의 선결 조건이라고 하기엔 부족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부의 축적을 통해 욕망의 만족 상태에 이른다면 행복이 배가될 수 있을까? 제임스 앨런은 ‘무지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이기적 갈망으로 계속 강화되는 이 믿음이야말로 세상 모든 불행의 원천이다’라고 말한다.


행복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제임스 앨런은 이기심을 꼽는다. 그것도 자기의 이기심이 아닌 타인의 이기심을 불행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한 천국의 문턱에 다다를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자기의 들보는 바라보지 못하고, 타인의 티끌만 바라보는 어리석은 행태에 기인한 것이다. 모든 불행의 원인을 내적으로 귀속시킬 때 좀 더 객관적인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제임스 앨런은 행복은 ‘기쁨과 평화가 샘솟는 완벽한 정신적 만족의 상태’라고 정의하며, 이와는 반대로 욕망은 ‘지옥의 영역’이라고 단언한다. 이는 행복의 반대말이 불행이 아닌 욕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욕망을 통해 불행은 그 실체를 더욱 가까이 드러낸다.


천국과 지옥은 마음의 상태이다


자아와 모든 이기적 욕망, 자아의 부정은 대척점에 있다. 이런 상태가 곧 천국과 지옥의 상태라고 제임스 앨런은 정의한다. 역설적으로 사사로운 행복만을 추구하다 보면 오히려 행복에서 멀어질 것이라고도 한다. 이는 얻기 위해 포기하라는 다소 모순적인 어법으로 연결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자발적으로 양보를 하고 손해를 입는 것, 그것이 참으로 생명의 길이다’라고 역설(力說) 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이런 이익 지향적인 행동이 과연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했을까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세상사는 한 개인의 의식과 지적 수준으로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변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을 다 무시하고 과연 이익의 관점에서만 접근한다고 그런 이익을 누릴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그런데도 대부분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근시안적인 행위의 이면에는 돈을 모든 가치의 총체로 보는 물신주의가 만연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을 보면, 무산자를 불행한 위치로 떨어뜨리는 위세를 발휘하기도 한다. 그런 위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른 것은 다 양보하더라도 금전적인 이익을 결코 포기하지 못한다. 필자의 경우를 살펴보자면, 파산에 준하는 상황을 겪고 오히려 기부금 액수를 늘려 이런 상황에 역행했던 적이 있다. 당시에는 어차피 한두 푼 덜 쓴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아 차라리 마음을 비우고, 진정한 마음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평소보다 많은 기부를 했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재정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에 상응하는 금액이 생겨 주변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던 적이 있다.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때 ‘뿌린 대로 거둔다’는 아주 단순한 진리를 몸소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 경험은 제임스 앨런이 주장하는 ‘자발적으로 양보를 하고 손해를 입는 것’의 의미를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행복의 추구는 어떤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는 것일까?


변치 않은 진정한 행복은 영속적인 것에 마음의 중심을 둘 때만 찾을 수 있다.


제임스 앨런이 말하는 영속적인 것이란 자아를 초월한 순수성, 자기희생, 보편적 사랑의 정신과도 같은 마치 도덕과 윤리 교과서에 나올법한 뻔한 가치들이다. 실제로 이런 것들이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을 알면서도 이를 실천하는 이들은 드물다. 제임스 앨런이 이런 가치들을 언급한 것을 보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근거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티끌만 한 사심도 없이 타인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최고의 행복을 얻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들어서게 된다.


제임스 앨런이 행복을 언급하며 이와 같은 뜻으로 보는 개념은 조화라는 단어이다.


조화는 우주를 지배하는 위대한 법칙의 한 양상이며, 사랑은 그 법칙의 정신적 표현이다.


조화는 물리적인 질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적으로 사랑이 그런 가치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은 부조화의 한 형태인 이기심이 불행의 원인임을 직관하게 한다.


벌라이의 시 <행복의 비결>에서는 이런 행복을 찾는 여정을 우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행복을 찾는 여정 속에서 늘 행복은 달아났지만, 결국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와 함께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눔으로 인해 결국 행복은 ‘나는 너의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자신의 작은 이익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편협하고 옹색한 자아를 포기하라. 그러면 당신은 천사들의 무리에 낄 것이며, 보편적 사랑의 본질과 하나가 될 것이다.


이런 자아의 포기는 나눔의 기쁨으로 연결된다. 제임스 앨런은 말한다. 당신의 재산, 지적 능력, 사랑을 이웃과 나눈다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순수한 사랑의 선물에는 늘 축복이 뒤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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