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의 길
제임스 앨런이 이 장에서 처음 언급하는 것은 동화에 대한 우화이다. 동화는 단순히 도덕과 윤리의 교과서로만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설화 형식으로 존재했던 이야기가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인 동화로 탈바꿈하면서 다소 순화된 이야기로 변했지만 본디 동화는 성인과 아이의 구분이 없었던 장르에 불과했다. 이런 동화를 언급한 것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천사와 요정과 같은 존재들이 실제로 ‘생각의 힘과 존재의 내적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이해하게 된 사람의 정신세계’에서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선(善)의 힘에서 저자가 강조한 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도덕규범에 순응하는 차원과는 결을 달리한다. 제임스 앨런이 정의하는 선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순수한 생각, 고귀한 영감, 이타적인 사랑, 자만심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런 가치는 현대 사회에서는 형이상학적인 가치로 여겨질 정도로 낯선 것들이다. 그만큼 물신화된 세상에서는 권력과 자산, 명예와 같은 것들이 우리의 가치 자산의 자리를 대부분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병은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명제는 현대 사회를 관통하는 핵심 테제다. 오래전 살았던 제임스 앨런이 현대와 같은 복잡한 세상에서 심리적 가치가 중요시될 수밖에 없는 세상을 예견했던 것은 아닐 테지만 그가 살았던 시절부터 이런 관념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가 언급했던 것처럼 ‘육체의 조건과 현상이 정신 현상을 결정한다’는 과거의 믿음을 부정하기도 하지만, 요즘에는 다시 육체가 정신에 끼치는 영향 또한 간과할 수 없다는 논리를 접하게 되면, 진리 또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꾸준히 변주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질병을 인식하는 방식은 과학적인 믿음과 다소 거리가 있다. 그는 질병이 ‘우리 자신의 잘못이나 죄의 결과’라고 치부한다. 이는 중세 시대에 신 중심의 사고를 가졌던 생각과도 일맥상통한다. 제임스 앨런이 살았던 시대가 비교적 근대라고 한다면 이런 믿음이 사라졌을 법도 하지만 이런 주장을 펼쳤던 것은 그런 시대로 회귀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좀 더 이상화된 관점에서 질병의 근원을 유추했던 결과로 보인다. 결국 ‘강하고 순수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에게서 질병이 달아난다는 것으로 결론 맺는 것을 보면, 내적인 심적 작용이 병의 근원임을 실감케 한다.
‘부정적인 감정 = 병’이라는 도식은 제임스 앨런이 조화롭지 않은 정신 상태의 결과가 병의 근원이라는 사상에서 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질투심, 의심, 걱정, 증오, 방종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반드시 떨쳐야 할 마음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건강과 성공의 관계 또한 정신적 조화와 신체적 조화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정신적 조화가 신체적 건강을 만드는 것처럼, 신체적 건강은 정신이 계획한 바가 현실 속에서 조화로운 순서대로 실현되도록 뒷받침한다.
제임스 앨런은 믿음의 힘이 불후한 업적의 원천임을 설파한다. 이런 믿음은 신과 우주, 자신의 일, 성취한 능력 등에 대한 믿음으로 그 범위를 좁혀 현실의 상태에 이른다. 믿음의 힘이 성공을 가져온다고 하는 주장은 다음 구절에서 더욱 명징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믿음의 힘은 불확실성의 어두운 바다를 갈라놓고, 모든 곤란의 산을 무너뜨려 믿음을 가진 영혼이 무사히 지나가게 한다.
‘믿음은 성공을 가져온다’고 말하는 장에서 여인에 대한 일화는 다소 이상적인 메시지로 들린다. 자기에게 주어진 여건하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라면 성공과 실패에 연연할 것 없다. 그러니 이런 믿음만으로도 성공의 열매를 가져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제임스 앨런은 에둘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어리석은 자에게는 불평, 현명한 자는 침묵 속의 기다림이 공식인 셈이다.
우리는 종종 운명이 절대적인 힘에 좌우된다는 숙명론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제임스 앨런은 ‘당신의 운명은 당신이 만들고 있다’고 단언한다. 그 이유는 ‘생각의 주된 경향이 당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이타적인 정신을 도야하라.
어찌 보면, 현대 사회에서 거의 일어날 리 없을 것 같은 이 단순하고 사소한 것 같은 진리가 우리의 운명을 끌고 가는 수레바퀴일지도 모르겠다.
제임스 앨런의 사상을 보면, 정신적인 건강과 성공 등 다소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설파하지만 힘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 장에서 말하는 힘은 타인을 억압하고 제어하는 힘이 아니라 수양을 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힘의 원천을 말한다. 이런 힘의 원천을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에는 작은 일조차 완벽하게 수행하고, 이를 토대로 큰 일조차도 이뤄갈 수 있는 습성을 함양하라는 지침도 포함된다. 이런 힘을 약화시키는 요소에는 육체적 방종과 경솔한 언행, 어리석은 잡담, 이기적인 논쟁이 있다. 필자의 경우를 예를 들자면, 한때는 이런 언행과 잡담, 논쟁 속에 매몰되어 마치 이런 것들이 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고 살았던 적도 있다. 항시 이런 것들 뒤에서 맞이하게 된 공허의 감정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고서도 말이다. 흔히들 이런 것들은 인간관계, 표현력, 자존심 등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제임스 앨런은 압도적인 힘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의 평정과 냉정함을 개발’ 해야 한다고 한다. 필자가 스스로를 나약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이유는 이런 평정심과 냉정이 내적으로 아직까지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수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어온 터라 그런 경험들로 인해 내면의 바다가 동토의 땅이 되었거니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도 감정적 동요가 이는 것을 보면, 사시사철 파도치는 해안가의 포말과도 같은 것이 필자의 마음 상태였던 것이다.
격정은 힘이 아니고, 힘의 남용이며 분산이다.
제임스 앨런의 이런 정의는 부동의 힘이 우리에게 주는 가치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히스테리와 같은 것을 일으키지 말고, 근심을 한다거나 경솔한 생각이나 행동, 경박함을 배격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찮은 것에 정신력을 낭비하지 말라’는 장에서는 필자가 즐겨했던 행동들이 그대로 금기대상임을 일깨워준다.
시끄럽고 자제력 없는 웃음, 타인에 대한 비방과 시시껄렁한 잡담, 단지 남을 웃기기 위한 농담을 멀리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적절한 유머와 위트는 삶의 윤활유처럼 작용한다. 이런 가벼운 행동이야 사회생활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경박한 행동이 정신적인 성숙을 저해한다고 한다면 다시금 이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는 있어야 할 것이다. 제임스 앨런이 이런 주장을 했던 이유는 ‘유치하고 어리석은 습관이 몸에 배면 정신적인 힘과 영적 삶이 모두 파괴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제임스 앨런이 내적인 힘을 키우기 위해 독자들에게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단 하나의 인생 목표를 세워라. 정당하고 유용한 목표를 갖고, 그 목표에 아낌없이 매진하라. 어떤 것에도 한눈팔지 않도록 하라.
한때 필자 또한 도전을 이유로 감당할 수도 없이 많은 일들을 벌려놓은 적이 있다. 하고픈 일들이 많아서 이것저것 일을 벌이다 보니, 해야 할 일들은 많아졌고 시간과 재정적 부담은 갈수록 커져갔다. 그런 와중에도 생각 없이 무작정 벌려놓은 일들을 수습하느라 건강마저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결국 스스로 만들어 놓은 틀에 갇혀 번 아웃 증상이 오고 나서야 벌려놓았던 일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청춘 시절에는 경험 삼아 다양한 일들에 도전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중년이 넘어선 시점에서는 뭔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한 가지 찾아야 한다.
한때 게리 켈러, 제이 파파산이 쓴 ‘복잡한 세상을 이기는 단순함의 힘’이라는 부제를 가진, 원씽(THE ONE THING)’이란 책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적이 있다. 이 책을 읽고, 공감이 갔던 이유는 갈수록 복잡한 사회에서 현대인이 신앙처럼 받들고 있는 멀티태스킹이라는 신화가 얼마나 몰이해에 기반을 둔 믿음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임스 앨런이 설파했던 것처럼, 성공의 비결은 ‘확고한 믿음과 현명하게 설정된 목표’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인식을 통해 '시야는 계속 더 넓어져,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인생의 목적이 점차 눈앞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