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의 길
제임스 앨런이 이 장에서 주장하는 힘의 근원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생각 또한 힘의 원천임을 직관하게 된다. 증기, 전기, 원자력과 같은 역학적 힘의 원리를 잘 파악하는 인간이 생각의 힘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적인 영역의 힘 중에서도 제법 강력하고 구원이나 파멸의 흐름으로 영향을 끼치는 생각의 힘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개념적 관찰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쓴 제임스 앨런의 견해에 따르면, 인류는 생각의 힘을 소유하기 시작했고, 통제하기 직전의 상태에 이른다고 기술한다. 그러면서 여전히 인간은 ‘이기주의의 물결 위에 떠 있는 지푸라기처럼 자신의 무의식적 힘에 노예처럼 종속되어 있는 처지’라고 판단한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 대한 언급도 나오는데, 저자의 주장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국가적 재난이나 번영의 원인을 그 시대에 국가를 지배했던 생각과 욕망에 관련시켰다. 생각이 사건을 일으키는 원동력이라는 이해는 그들이 예언한 내용의 기초이며, 모든 진정한 지혜와 힘의 기초이기도 하다.
고로 국가적 사건들이나 전쟁, 전염병, 기근과 같은 재해 또한 잘못된 생각의 힘들이 모인 결과라고 설파하는 것이다.
물질만능주의를 살아가는 세태에서 앞선 시대를 살았던 제임스 앨런은 과연 후일의 세상을 어떤 식으로 평가할까? 그의 견해는 명료하다.
물질은 객관화된 생각이다.
이런 명제 속에서 제임스 앨런이 주창하는 우주 생성의 비밀을 풀어보면, 생각 또한 막연한 개념적 가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흐릿해질 수밖에 없다.
우주는 생각에서 생겨났다. 물질을 궁극적으로 분석하면 물질이 객관화된 생각에 불과함이 밝혀진다.
이런 파격적인 주장이 낯선 것만은 아니다. 성서에서도 천지의 창조주인 신은 언어로서 세상을 창조했다. 언어란 곧 생각, 의식에서 기원한다. 이런 도식을 이해한다면 성서 말씀을 막연히 신화나 우화 수준으로 격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양자역학과 같은 과학 이론 또한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물리적 기준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측면에서 보면, 이런 판단은 무지의 소산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제임스 앨런은 부정적인 생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지와 신념의 부족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이런 정신 상태는 ‘악의 힘과 우월성에 대한 타고난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무신론에 기반한 정신 상태라고도 일갈한다. 그러면 이런 정신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것은 정신적인 인식과 자각을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필자 또한 제임스 앨런의 사상에 매료되었던 것은 인간이 더 이상 지식과 정보만으로는 한계에 이를 만큼 고차원적인 정신 영역에 대한 개척이 필요한 시점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보가 빈한했던 시절에는 지식과 정보가 그 자체로서 엄청난 힘을 발휘했지만 이제는 그런 정보가 넘쳐나기에 이를 선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 된 것이다. 이런 지혜는 의식을 기초로 한다. 고로 막연히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한 과정이 얼마나 몰이해에 기반을 둔 것인지 안다면 방향을 돌려 의식 수준 향상을 꾀하는 것이 오히려 새로운 시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합리적인 수순일지도 모른다.
‘상황의 노예가 되는 것’이라는 장에서는 그런 노예처럼 예속된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다.
그런 사람은 고통을 통해 교육받으며, 쓰디쓴 경험의 스트레스를 통해 결국 약한 자에게서 강한 자로 변한다.
인간은 시련과 고통이 없으면 현재 상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설사 그것이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이라도 그렇다. 그나마 어떤 시련과 고통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라야 조금이나마 의심 어린 눈초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런 세상의 본질을 제대로 직시하기 위한 행동에 돌입할 뿐이다. 모든 것이 문제가 없을 때 오히려 인간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다. 타인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는 악의적인 도발 또한 이런 자신의 위치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행한 무지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결국 고통과 쓰디쓴 경험의 세례를 받은 후라야 인간은 원초적인 나약함에서 벗어나 강한 인간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제임스 앨런이 이점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그런 과정이 누구나 거쳐야 할 통과의례임을 직시하게 만든다.
정신의 수양은 막연히 세상과의 결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타락한 세상이라도 그 속에서 수양은 필요하다. 제임스 앨런이 설파한 것처럼 정신이 ‘걱정’이라는 낮은 단계로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고차원적인 단계에서 정신을 회복하라고 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수양의 결과는 세상 속에서 고뇌하는 문제의 해결뿐만 아니라 생각과 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도 예측할 수 있는 지혜를 안겨다 준다.
마음의 평온을 위해서는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걱정의 그림자만 드리워질 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고요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인 것이다. 생각의 힘을 고요하게 집중시키다 보면, 결국 자신의 내적 본성을 깊고 철저하게 탐구할 수 있게 된다고 제임스 앨런은 말한다. 필자 또한 최근 행동을 복기하게 된 것 또한 가급적이며 조용한 상황에서 사유의 시간을 늘렸던 이유 때문이다. 흔히들 말하는 메타인지 작용이 이전보다 세밀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지속적으로 내적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고요한 시간 속의 내적 탐구는 무엇을 가져다줄까?
생각의 힘이 삶의 상태를 재조정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발휘하는 마법 같은 효력에 대해 비로소 어느 정도 정확한 이해를 할 수 있다.
제임스 앨런이 ‘생각은 힘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생각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힘의 여부에 따라 내부의 힘을 통제할 수 있고, 그런 차이에 따라 구세주나 죄인으로 갈릴 수도 있음을 안다면 생각의 힘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진정한 힘을 획득하고 영속적인 평화의 길로 향하는 지름길은 없을까? 제임스 앨런은 단언한다. 자제, 극기, 자기 정화에 의한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다고.
또한, 내적 혼란에 의해 심적인 변동성을 줄이려면 ‘고요 속에 들어가기’를 매일 실천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마음의 평온을 얻고 자신 내부의 생각의 흐름을 억제하고 자제하는 사람이라야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며, 자신의 마음과 삶을 비옥하게 한다’ 설파한다.
제임스 앨런은 지속적으로 내적 상태가 바뀌면 외부 환경도 바뀐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제법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관계에서조차 예외가 없다.
당신의 내부가 바뀌어진 정도만큼 삶에 대한 당신의 견해도 바뀌게 된다. 다른 사람에 대한 정신 자세가 바뀌면 그들이 당신을 대하는 태도도 행동도 바뀐다.
실제로 필자 또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내적인 변화가 가속화된 이후부터는 타인에 대한 말다툼과 인신공격보다는 관용적 가치를 우위에 두게 되었다. 인간은 원래 불완전한 속성을 가진 동물이라는 인식이 주효했다. 이런 관점에서 사람을 대하면, 사소한 실수뿐만 아니라 일부 의도성을 띤 행동조차도 관용의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어떤 식으로든 타인에게 상처를 줘서는 안 되겠다는 강력한 의지만으로도 불필요한 갈등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그런 과정이 녹록한 것만은 아니다. 그럴 때는 상대방을 유한한 생에서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면 부정적인 마음에 벗어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인간은 감각적인 성향의 동물이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그런 상대의 의지를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런 알아차림이 결국 태도와 행동을 바꿀 수 있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것을 지향하는 생각 속에 머물라.
그리하면 당신은 가장 위대한 존재를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의 정신을 가장 고귀한 것에 고정시켜라.
그리하면 당신은 가장 고귀한 존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