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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치 않는 환경을 극복하는 길

번영의 길

by 정작가


좋은 환경에서 일상을 영위하고자 하는 바람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생이 늘 바람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제임스 앨런은 이런 환경의 근원이 ‘원인과 결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사람의 아주 사소한 생각이나 말, 행동에서부터 천체의 배치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법칙은 우주 최고의 힘으로 통치한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환경 또한 인과관계의 결과라고 한다면 그 원인을 세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인과의 법칙’과 ‘법칙에의 복종’이란 장에서 그런 원인에 대해 파고든다.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증오, 분노, 질투, 시기, 욕망, 탐욕과 같은 것들은 인생을 좀먹는 악의 화신으로 우리를 고통스러운 길로 이끈다. 이런 고통의 근저에는 ‘무지한 상태에서 영원한 법칙을 뒤엎으려는’ 시도가 따른다. 이는 곧 질병, 실패, 불행과 같은 외부적 상황으로 전이된다. 반대로 사랑, 온순함, 선의, 순수의 가치는 영원한 법칙의 조화를 이루면서 건강, 평화로운 상황, 성공과 행운의 형태로 실현되기도 한다. 이런 인과관계를 이끄는 과정 속에서는 반드시 ‘법칙에의 복종’이라는 원리가 숨어있다.


저자는 ‘우주 전체를 속속들이 관통하는 이 위대한 법칙을 완벽하게 이해’해야만 복종이라는 정신 상태에 들어간다고 가르친다. 제임스 앨런의 사상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이런 우주적 질서에 대한 확신이다. 이를테면, 우주 천체의 수많은 별과 행성이 일정한 규칙과 질서에 의해 운행되고 있는 과학적 사실은 그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제임스 앨런이 인과의 법칙과 법칙에의 복종을 설파한다고 해서 인간의 삶이 무조건 법칙에 종속된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인간의 가치를 종속적인 관점에서 수용할 위험성이 있기 있기 때문이다. 저자 또한 위대한 법칙의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삶은 당신이 만드는 것’이라고 쐐기를 박는 것은 인간이 단순히 우주적 질서에 대한 수용자가 아니라 이를 토대로 자기 의지를 펼쳐갈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장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의지’다. 이런 의지는 처음에는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정신적인 힘과 영적 힘’의 결합으로 인해 원하던 상황에 이를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킨다.


제임스 앨런의 사상은 불행한 환경을 탓하지 말라고 한다. ‘원인은 당신 내부 있다’는 구절은 이런 사상을 함축적으로 제시하는 문구다. 이런 주장을 무조건 적으로 수용하게 된다면, 사회구조적인 문제는 인간의 삶에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그렇지만 불행한 환경이 모두 개인 탓일 수는 없다. 다만 저자는 모든 것을 환경 탓으로 돌리기만 하려는 자세로는 본질적으로 문제해결에 어려움이 있다는 상황을 가정하고, 다소 완곡한 어법으로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을 가능성이 크다. 법칙의 세계에는 불평꾼의 자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과연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고, 개인이 할 수 있는 노력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제임스 앨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라. 그러면 당신의 외적 삶도 바뀔 것이다.


이는 삶을 대하는 관점에 따라서 외적의 삶의 형태도 바뀔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령 작은 것은 소홀히 하고, 발전을 기대한다는 것은 오산이라는 가르침이 그런 것이다. 아무리 환경이 상황을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야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신이 원하는 위대한 선을 이루기 전에 당신이 이미 지니고 있는 것을 충실히 이용해야 한다.


이는 아무리 거대한 운명이 삶을 덮친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역량의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운명도 결국은 비껴갈 것이라는 경고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런 측면에서 ‘당신의 주위 환경을 기품 있게 하라’는 메시지는 생각할 여지를 안겨준다. 이는 일상으로 주어지는 삶에 대한 태도가 어떠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일종의 척도라고도 볼 수 있다.


당신의 집을 한 점의 얼룩도 없이 깨끗하게 유지하라. 자신의 한정된 여건 속에서 최대한 멋있고 기분 좋은 공간으로 만들어라.


이 말을 비단 주거환경에 대한 충고성 발언으로 곡해하면 곤란하다. 이는 단순히 집을 깨끗이 청결하게 유지하라는 차원을 넘어 내적으로도 항시 정화된 상태를 유지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생활하다 보면, 주변 환경은 마음속 상태와 정확히 등치를 이룬다. 제임스 앨런 또한 인간의 그런 속성을 간파했을 것이다.


소위 악으로 표현하는 것들의 실체 또한 ‘가면을 쓰고 나타난 축복이다’라고 일갈하는 것은 나약한 자신을 직시하라는 가르침이다.


당신이 스스로의 정신을 형성하고 만드는 한, 당신의 운명을 만드는 사람은 당신 자신임을 충분히 그리고 완전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이는 주변의 어떤 환경도 주체적인 자신의 의지를 꺾을 수 없고, 그런 의지가 충천하는 한 악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고도 자신의 길을 무연히 걸어갈 수 있음을 알려준다. 제임스 앨런은 또한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지 말라’ 고도 경고한다.


당신이 자기 자신을 극복한다면, 온갖 불리한 상태도 극복해 낼 것이며 모든 어려움은 당신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누구든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자가 되길 원하지 패자가 되길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한때 주변에서 금주와 금연에 대해 말하며 자기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이것을 끊을 수 있다고 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내용을 실천한 사람은 없었다. 필자는 비록 맹세를 하지 않았지만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 이를 실행했고, 불리했던 상황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


‘덕의 획득’과 ‘부보다 덕을 먼저 추구하라’는 장에서 말하는 제임스 앨런의 가르침은 이 문단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당신이 진정으로, 그리고 영원히 번영을 누리고 싶다면 먼저 덕을 갖추어야 한다.


이 말은 비록 경박하다고 생각하는 부를 얻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덕을 갖추지 않고서는 그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하물며 부보다 더 큰 가치를 추구하는 상황에서 덕을 갖추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공에만 목표를 두고 성공을 인생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아, 그것을 향해 탐욕스럽게 달려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는 제임스 앨런이 현대인들에게 주는 경고성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마치 부나방이 촛불을 향해 달려들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덕을 갖추지 못한 채, 무작정 성공이라는 촛불을 향해 날아드는 부나방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자기완성에 목표를 두고, 유익하고 이타적인 봉사를 통해 사회의 번영에 기여하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 영원히 변치 않는 최고의 선을 향해 믿음의 손을 항상 뻗으라.


이 말은 어쩌면 <생각의 지혜>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생각의 지혜>가 사유의 가치를 일깨우는 저작이라면 궁극적으로 개인의 역량은 이타적인 가치를 좇아 최고의 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당연한 귀결일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동기를 철저히 파악하라’는 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온다.


당신이 가진 돈이 아무리 적더라도 지금 그것으로 선을 행하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돈을 많이 벌수록 점점 이기적으로 되어간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 때 곧잘 변명을 하곤 한다. 어떤 조건이 완성된다면 하는 가정하에 자비를 베풀어 줄 것처럼 하고도 막상 그런 상황에 이르게 되면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러고 보면, 제임스 앨런이 살아가던 시기가 본격적으로 자본주의가 도래하지 않았던 시기임을 감안한다손치더라도 그런 현대인의 속성을 그대로 꿰뚫고 있다고 보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필자 또한 위기에 닥쳐 파산에 준하는 재정위기를 겪은 적이 있었다. 그때 필자가 택한 선택은 오히려 기부의 범위를 확장시킨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쓰고 남는 돈으로 기부한다고 생각한다면 영원히 그럴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즘 재정 상황이 안 좋게 되면 가끔 그때의 일을 떠올려 후회할 때도 있지만 그때의 선택으로 일생의 한 과제를 영원히 수행하지도 못하고 죽을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으니, 그런 개운함에 비하면 당시로서는 최적의 선택을 한 셈이 된 것이다.


선을 진정으로 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실천에 앞서 돈이 생기길 기다리지 않고, 희생의 제단으로 간다.


그렇다. 누구든 자선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애쓰고 있지만 이를 실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것은 일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자선의 가치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도 물론 그런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베풀었던 자선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은 그만큼 실천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미리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파산에 준하는 재정적인 고통이 없었다면 아마도 평생 자산의 축적이 절대진리고, 성공의 방정식이라고 생각하며 남은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때론 결핍은 예기치 않은 인생의 방향을 알려주기도 한다. 고통과 시련이 무작정 나쁘다고만 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진정한 부란 무엇인가?’라는 장에서 제임스 앨런은 말한다.


돈이 많다고 진정한 부를 이루는 것은 아니며, 지위나 권력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에만 의지하는 것은 미끄러운 장소에 서 있는 것과 같다.


이는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성공 방정식이 결코 진정한 부가 아님을 일깨워준다.


가난과 무기력의 요소가 극복되면 모든 것을 이겨 내는 막강한 힘이 내부로부터 생겨나며, 최고의 덕을 자신의 것으로 굳히는 데 성공한 사람은 온 세상을 자신에게 복종시킨다.


결국 진정한 부를 얻는 것은 자본주의의 상징적인 돈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덕을 자신의 것으로 굳히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덕의 완성을 통해 우리가 그토록 신처럼 받드는 자본의 획득 또한 가능하다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다. 다만 이런 가치를 실현하는 이들에게 자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부는 그저 부수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제임스 앨런은 지금까지 다양한 경로를 거쳐오면서 원치 않는 환경을 극복하는 길에 대해 여러 가지 가르침을 주었다. 이 장에 그토록 많은 지면을 할애했던 것은 원치 않는 환경을 극복하는 길이 인생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내린 결론은 결국 ‘자아에서 벗어나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당신의 삶을 고되게 만드는 상황이 무엇이든지 간에, 당신은 자기 정화와 자기 극복의 힘을 내면에서 계발하고 이용하여 그 상태를 벗어나고 극복할 수 있다.


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내면의 단단한 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일깨워준다.


고통은 인간을 거룩한 기쁨의 길로, 신성한 생각의 말과 행위의 길로 인도한다.


평탄한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대부분 부와 명예는 최적화된 성공의 방정식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신성한 생각의 말과 행위는 결코 깃들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일부러 고통의 길을 걸을 수도 없는 일이니 운명의 족적에 의해 각기 갈라진 달란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운명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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