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형의 선택(Book Size)
[ 판형 : Book size ]
책의 크기와 비율을 정하는 기본 규격을 '판형'이라고 합니다. 내용이 어떤 밀도와 속도로 읽히기를 원하는지, 한 페이지에 어느 정도의 정보를 담을 것인지를 미리 정하는 조건으로 작동합니다. 이 기준이 정해지면 그 안에서 그리드와 여백, 글자와 이미지의 크기가 자연스럽게 결정됩니다. 이 글에서는 판형을 정체성을 대신 정의하는 개념이 아니라, 삶과 일에서 반복되는 선택이 일정한 방향으로 쌓이도록 붙잡아주는 '구조적 기준'으로 의미합니다.
기성 규격이 주는 안락함과 함정
우리가 회사나 일상에서 가장 많이 쓰는 종이는 A4나 B5입니다. 이 규격은 일종의 '세상의 약속'과 같습니다. 종이 한 장 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재단되고, 어떤 가방에도 쏙 들어가며, 어느 프린터에 넣어도 문제없이 출력됩니다. 경제적이고 안전하며, 무엇보다 남들에게 "왜 이 사이즈를 썼나요?"라고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는 기준입니다.
많은 사람이 삶의 모양을 정할 때도 이런 '기성 규격'을 선택합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자격증,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함, 연차에 맞는 연봉 같은 것들이 우리 삶의 A4가 되고 B5가 됩니다. 이 규격 안에 나를 맞추면 당장은 효율적으로 보이고 주변의 인정도 받기 쉽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나의 모든 진심과 능력이 그 규격에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의 재능은 A4라는 칸에 담기엔 너무나 섬세하고, 어떤 사람의 열정은 B5라는 틀에 갇히기엔 너무나 역동적입니다. 효율만을 위해 만들어진 기성 규격에 내 삶을 억지로 구겨 넣다 보면, 정작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나만의 고유한 모습들은 종이 밖으로 잘려 나가게 됩니다. '남들과 비슷해 보이는 안도감'을 얻는 대신, '나라는 사람만의 특별한 비율'을 잃어버리는 셈입니다.
변형판 : 나만의 비율을 선언하는 용기
진정으로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때로 '변형판'을 선택합니다. 기성 규격보다 종이가 버려지는 부분이 생기고, 만드는 과정이 까다로워 비용이 더 들지라도, 자신의 메시지를 가장 완벽하게 전달할 수 있는 독자적인 비율을 찾아냅니다.
조금 길쭉한 모양으로 시원한 느낌을 주거나, 정사각형 모양으로 안정감을 주기도 합니다. 이런 '변형 규격'은 단순히 튀어 보이고 싶어서 하는 선택이 아닙니다. 내가 담고자 하는 내용의 무게와 독자가 느껴야 할 기분을 최우선으로 고민한 결과입니다.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이 정해놓은 성공의 규격을 거부하고 나만의 '변형판' 삶을 살기로 결정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정해진 틀에 나를 맞추는 부품이 아니라, 내 삶이라는 책의 '첫 번째 독자이자 작가'가 됩니다. 조금 돌아가고 비용이 들더라도, 나만의 비율을 찾아낸 사람의 삶은 그 자체로 독보적인 분위기를 풍기게 됩니다.
읽히는 방식은 그 '그릇'에서 결정된다
이렇게 나만의 변형판을 고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라는 책은 어떤 방식으로 읽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닿게 됩니다. 우리가 접하는 단행본, 사진집, 여행잡지, 제안서가 서로 다른 인상을 주는 이유도 이 규격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반 단행본 (128x188mm / B6 내외) :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로 만들어집니다. 독자가 카페나 지하철에서 오랫동안 집중해서 읽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에, 휴대성과 몰입감이 가장 좋은 사이즈를 선택합니다.
사진집 (210x297mm / A4 이상) : 크고 넓은 판형을 사용합니다. 멋진 풍경이나 작품 이미지 한 장이 충분히 숨을 쉴 수 있도록 넓은 여백을 확보하여 시각적인 감동을 극대화합니다.
여행잡지 (210x275mm / 국배판 변형) : 사진과 짧은 글이 어우러져 빠르게 넘기며 읽히는 리듬을 선택합니다. 시원시원한 크기 덕분에 마치 그 장소에 있는 것 같은 현장감을 전달하기에 유리합니다.
회사 제안서 (210x297mm / A4 표준) : 짧은 시간 안에 핵심을 파악해야 합니다. 복잡한 표와 도표, 구조적인 배치가 한눈에 잘 들어오도록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정돈된 규격을 사용합니다.
어느 판형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어떤 방식으로 읽히기를 바라고 만들어졌는지'입니다. 규격이 정해지면 글의 길이, 이미지의 비중, 페이지의 리듬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무엇을 말할지를 고민하기 전에, 어떤 크기의 그릇에 담을지를 먼저 정하는 것. 이것이 모든 선택을 같은 방향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기준입니다.
삶에도 각자의 기준이 있다
이 개념을 삶에 적용해 보면 이해가 훨씬 쉬워집니다. 사람의 삶에도 저마다의 운영 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단행본처럼 한 가지 주제를 오래 깊이 파고드는 삶이 잘 맞고,
어떤 사람은 사진집처럼 감각적인 장면과 시각적 표현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여행잡지처럼 다양한 경험을 빠른 리듬으로 엮어가는 삶이 어울리고,
어떤 사람은 제안서처럼 명확한 구조와 목적이 있는 역할에서 힘을 발휘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준이란, 한 사람이 어떤 결의 삶을 어떤 호흡으로 반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잣대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어떤 밀도의 선택을 지속해야 스스로 지치지 않고 나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정하는 기준입니다.
이 기준이 분명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남들의 '타인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게 됩니다. 단행본처럼 살고 싶은 사람이 여행잡지의 속도를 따라가고, 사진집처럼 여백이 필요한 사람이 제안서 같은 촘촘한 삶을 억지로 감당하게 됩니다.
사람보다 역할이 앞설 때
'퍼스널 브랜딩'을 이야기할 때 이 지점은 자주 놓치기 쉽습니다. 많은 경우 퍼스널 브랜딩은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보이면 좋을지'를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 '전문성'과 '역할'이 중심이 되고, 정작 자신은 그 아래에 놓이게 됩니다.
자신이 기준이 되어야 할 자리에서 오히려 '전문성'과 '역할'에 종속된 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지가 곧 나 자신이 되어 버리고, 그 틀에서 벗어나는 선택은 쉽게 불안해집니다. 한 번 정해진 포지션에서 벗어나면, 마치 퍼스널 브랜딩 자체를 벗어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하기보다, 역할이 요구하는 기준에 자신을 맞추며 움직이게 됩니다. 사람보다 포지션이 먼저 서고, 그렇게 선택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말이 점점 많아집니다. 기존에 정해진 전문성과 역할의 틀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할수록, 그 이유를 스스로 설명해야 순간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선택의 구조가 이미 정리된 경우에는, 그런 선택 하나하나를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방향 위에서 이루어진 선택인지 이미 정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준이 생기자, 선택이 달라졌다
저 역시 오랫동안 제 삶의 기준 구조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디자이너'라는 역할에 충실하며 살아왔습니다. 여러 프로젝트를 경험하며 선택의 폭은 넓어졌지만, 그 선택들은 대부분 회사라는 조직이 미리 정해둔 규격 안에서만 허용되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남이 만들어준 A4 용지 안에서만 그림을 그려온 셈입니다.
독립 후, 미래의 방향을 다시 살피며 비로소 내 삶의 흐름을 어떤 틀 위에 놓을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붙잡고 고민을 되풀이한 끝에, 마침내 나만의 판형을 결정짓는 하나의 문장을 찾았습니다.
'디자인과 글로 생각을 전하는 사람'
2025년 4월 둘째 주, 이 문장이 머릿속에서 정리되는 순간 제가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고 싶은지도 함께 분명해졌습니다. 이 문장은 단순히 나를 설명하는 수식어가 아니라, 앞으로 내 삶이라는 책을 어떤 크기와 비율로 만들어갈지 결정하는 나만의 '변형 판형'이 되었습니다.
'디자인과 글로 생각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문장은 '직업'이나 '역할'을 설명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 문장은 오히려 제가 오랜 시간 쌓아 온 디자인이라는 사고방식과, 그 사고를 기록하고 확장하는 도구로서의 글쓰기를 어떻게 함께 가져갈 것인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표현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디자이너로 일하며 저는 자연스럽게 디자이너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시선은 결과물을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의미를 해석하고 구조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쌓여 있었습니다. 여기에 글쓰기가 더해지면서, 저는 디자인이라는 사고방식을 글로 옮겨 적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평생 디자이너의 시선으로 글을 쓰겠다는, 나만의 '삶의 호흡'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저의 역할을 선언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할 것인지를 분명히 하기 위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디자인이라는 강점을 버리지 않으면서, 글쓰기를 통해 사고를 확장하고 기록하는 삶. 그 방향이 정리되자, 어떤 일을 선택하고 어떤 작업을 계속해 나가고 싶은지도 자연스럽게 선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일회성 행사나 빠르게 소비되는 프로젝트보다, 의미와 스토리가 있는 호흡이 긴 제작물, 시간이 지나도 다시 꺼내어 읽히고 참고될 수 있는 아카이빙 가능한 작업에 더 안정적으로 사고하고 몰입하는 사람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독립 이후 새롭게 발견한 성향이라기보다, 회사 생활을 통해 이미 여러 번 경험해 온 감각에 가까웠습니다. 의미가 먼저 정리되고, 그 의미를 따라 디자인과 글이 함께 만들어지는 방식이 제 삶의 사고 구조와 속도에 더 자연스럽게 맞았습니다.
이 기준이 분명해지자, 자연스럽게 시선은 제 밖으로 향했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방향을 잃고 있는 사람들과 브랜드들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장면들은 독립 이후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부터, 충분히 정리되지 않는 자료를 바탕으로 디자인부터 시작하는 일들을 수없이 마주해 왔습니다.
충분한 고민 없이 이미 정해진 일정에 맞춰 만들어야 하거나, 겉모습만 그럴듯한 결과물들이 많았습니다. 왜 이런 형태여야 하는지, 왜 이런 디자인이어야 하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끝까지 분명해지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막연하게나마 생각해 왔습니다. 이 문제는 디자인의 기술적인 완성도 문제가 아니라, 출발점의 문제라는 것을요. 의미와 자료가 먼저 정리되지 않으면, 디자인은 그 의미를 대신 끌고 가야 하고, 그 부담은 결국 결과물에 고스란히 남게 됩니다.
긴 디자이너 경험을 통해 제가 가장 도움을 주고 싶었던 방향도 바로 여기에서 분명해졌습니다. 디자인이 의미를 대신 떠안는 브랜드가 아니라, 의미가 먼저 서 있고, 그 의미를 따라 디자인이 작동하는 브랜드를 만드는 일입니다. 제가 먼저 나만의 기준을 세워본 후에야, 방향을 잃고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멋진 디자인 이전에 '단단하게 정리된 의미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기준은 말하지 않아도 드러난다
이렇게 '의미가 먼저인 기준'이 분명해지면, 그다음에 따라오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반복입니다. 어떤 일을 선택하고, 어떤 일은 자연스럽게 내려놓는지, 어떤 방식의 결과물을 계속 남기는지가 겹치면서 한 사람의 방향은 점점 또렷해집니다. 빠르게 소비되는 작업보다 오래 남는 결과물을 고르고, 속도를 무리하게 바꾸지 않으며, 비슷한 밀도의 작업을 꾸준히 이어 가는 태도는 말보다 먼저 그 사람을 설명합니다.
'퍼스널 브랜딩'은 바로 이 반복이 외부에서 읽히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어떤 기준 위에서 일하는 사람인지가 자연스럽게 전해지고, 그 일관된 선택은 곧 신뢰로 이어집니다. 신뢰는 설득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같은 기준 위에서 반복된 선택이 만들어 내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판형'은 어떤 사람인지를 규정하는 이름이 아닙니다. 오히려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삶의 중심선에 가깝습니다. 기준이 분명할수록 남을 의식하는 말은 줄어들고, 나를 위한 선택은 또렷해집니다. 결국 브랜딩이란 나를 돋보이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삶의 구조 위에서 어떤 선택을 반복해 왔는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어떤 삶의 호흡으로 어떤 선택을 이어 나갈지가 정리될 때, 화려한 설명보다 진실한 태도가 먼저 전해집니다.
이 장이 남기고 싶은 것은 하나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의 시선입니다. 지금의 선택들이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이 속도와 밀도를 앞으로도 계속 유지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결의 책을 써 내려가고 있나요?
[ 내 삶의 기준을 점검하는 질문 ]
나는 지금 남들이 정해놓은 A4나 B5 같은 성공 기준에 내 삶을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지는 않나요?
내 본질을 가장 온전하게 담아내기 위해, 내가 용기 있게 세워야 할 '나만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나는 하나의 주제를 깊게 파고드는 '단행본' 같은 삶인가요, 아니면 찰나의 영감을 기록하는 '사진집' 같은 삶인가요?
내가 매일 반복하고 있는 선택들이 나만의 '삶의 호흡과 결'이라는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