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콜레트>
나는 누구의 그 무엇임을 거부한다
영화, <콜레트>
영화 <콜레트>의 배경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문화와 예술이 꽃피었던 프랑스 벨 에포크(Belle Epoque). 문화와 예술의 영광이 남성에게만 허락되었던 시대의 여서 작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가 주인공이다.
이 영화를 보고 콜레트를 단지 성공한 프랑스 여성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콜레트>는 성공하기도 했지만 실패하기도 했고, 작가이기도 했지만 작가임을 거부하기도 하며 '아이콘'이 아닌 실체로서의 콜레트와 '살아감'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골에서 자란 콜레트는 파리의 유명한 출판업자 윌리와 사랑에 빠지고 그를 따라 파리에 가게 된다. 하지만 윌리와의 결혼 생활과 화려한 파리는 콜레트가 그린 것처럼 행복하지는 않았다. 콜레트는 파리가 추앙하는 교양 속 감춰진 허위에 질려 파리를 떠나지만 윌리의 반성으로 다시 파리에서 살아간다.
파리의 셀럽인 윌리와 함께 파티를 가도 그곳에 있는 건 교양 속 감춰진 허위. 불평을 표해도 돌아오는 건 시골 출신이라 적응하지 못한 거 아니냐는 비아냥. 윌리의 바람을 목도한 콜레트는 불같이 화를 내며 파리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이내 윌리의 반성과 '거짓말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고 다시 파리로 향한다.
윌리의 출판업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작가들과 대판 싸운 윌리는 콜레트에게 글을 써주기를 요청한다.
평소에도 글에 관심이 많았던 콜레트는 자신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회상하며 노트를 채운다. 그렇게 완성한 글은 윌리의 마음에 들지 않고 콜레트에겐 상처로 남은 채로 책상 속으로 처박힌다. 몇 년 후 파산 압박에 다시 꺼내진 '클로딘' 노트는 최후의 수단이 된다.
그렇게 윌리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 '클로딘'.
예상과 다른 흥행에 '클로딘'은 더 이상 콜레트의 창작물만이 아닌 그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는다.
세상에는 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을까.
돈만 생기면, 파산만 피하면, '클로딘'만 잘되면 행복할 줄 알았던 콜레트는 점차 화려한 껍데기가 된다. 어릴 적 자신이 비난했던 허위 가득한 파티처럼. 처음부터 잘못 나온 책처럼. 윌리의 욕심이 커질수록 콜레트는 괴롭다. 그러나 콜레트는 '거침없이, 마음대로'를 택한다.
그렇게 '클로딘'으로 대변되는 삶이 아닌 콜레트 자신으로서의 삶을 찾아간다.
콜레트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던 나는 <콜레트> 예고편을 보고 콜레트라는 사람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의 이미지로서 대변되고 있고 영화가 그 지점을 보여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영화는 묵묵히 콜레트의 삶을 따라간다.
왜냐하면 콜레트의 삶은 '클로딘'의 성공 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클로딘'이 있기 전에도 콜레트는 존재하여 살아왔기 때문이다.
시대극을 시작할 때 어린 (대부분) 시골 출신 여성이 돈 많은 늙은 남성에게 '팔려'가면서부터 시작되곤 한다. 다수의 재현에 익숙해졌던 탓에 콜레트의 시작 역시 그렇게 진행될 줄 알았다.
하지만 <콜레트>는 여성이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하기 위해 파리를 가는 것을 선택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으레 '시골' 소녀가 가지는 도시에 대한 환상을 부풀리지 않는다. 대신 콜레트의 눈으로 화려한 도시가 속이 텅 빈 환상일 뿐임을 정확히 인지한다.
자신만의 기준이 정확히 있고(이를테면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그걸 침해받았을 때 과감히 남편과 파리를 떠나는 장면에서 나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불행 포르노'에 무의식적으로 익숙해져 있었던 스스로에게서 말이다. 누구나 자신을 괴롭히는 것에 대해 아무리 나이가 적고 가진 게 없어도 부당하다고 항의할 수 있다.
꼭 어떤 성취를 해야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님에도 대중문화에서는 [고통받고-> 그 고통을 참고 견디며-> 마침내 성공을 쟁취해내는] 서사가 만연하다.
고통은 참고 견디는 게 아니며 성공은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따로 있지 않은가. 초반에 느낀 깨달음과 당혹스러움은 영화의 끝까지 이어졌다.
'클로딘'의 성공 이후 (몇몇 사건이 있지만) 윌리와 잘 지내던 콜레트의 일상에 균열이 난다.
균열의 핵심은 콜레트와 자신이 쓴 소설의 주인공 클로딘과의 관계이다.
맨 처음 콜레트는 자신의 삶을 주입한 자아로서 클로딘을 인식한다. 윌리가 처음 그의 소설을 읽고 출판하지 못할 거라 얘기할 때 가장 속상해했고 또 클로딘의 성공에 가장 기뻐했던 콜레트였다. 하지만 클로딘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윌리의 욕망이 커짐에 따라 콜레트는 클로딘과 분리된다.
초반에는 콜레트가 클로딘을 따라간다. 길게 땋은 머리를 고수했던 콜레트는 타인들로부터 만들어진 클로딘의 이미지에 맞춰 머리를 자르고 윌리와 사진을 찍는다. 점차 인기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콜레트의 삶은 오직 클로딘의 탄생을 위해 강요된다. 그러다 미시를 만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반문하기 시작하며 '클로딘 되기'를 거부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창조해낸 클로딘으로부터의 탈피, 세상이 규정해줬던 아이콘으로서의 탈피를 통해 콜레트는 역설적으로 오롯이 자기 자신이 된다.
<콜레트>에는 여성 서사와 함께 퀴어 서사도 존재했다. 콜레트와 오래 함께 했던 연인 '미시' 캐릭터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통째로 묶어 놓은 재현이 의문이 들긴 하지만 이전 콜레트의 연인이었던 조지 라울 듀발 캐릭터도 있긴 하다.) 당시 프랑스 사회의 젠더 억압 속에서 (물론 계급적으로 용인이 있었겠지만) 미시는, 그때에도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억압을 억압이라 규정짓고 개인적인 차원에서라도 노력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윌리의 지배 방식은 말 그대로 가스 라이팅이다. 콜레트에게 글을 마음껏 쓰라며 ‘네가 항상 꿈꿔온 자연에서의 삶’과 집을 선물한다. 그리곤 곧바로 콜레트를 방에 가둔다. 내가 집을 선물했으니 내가 원하는 글을 쓰라는 것이다.
너(콜레트)에게는 ‘교장 선생님’이 필요하다는 윌리의 말이 인상 깊다. 부부이고 글을 같이 쓰고 인기와 부를 함께 누려도 어쨌든 나는 교장 선생님이고 너는 나의 지도가 필요한 학생이라는 것. 상대가 아무리 우수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성별이 여성이라면 일단 권력의 하위로 두고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 그 당시에는 ‘자연’스러웠을, 가부장제가 규정한 권력관계의 단면을 보여준다.
영화 속 콜레트가 윌리를 정말로 사랑한 건지, 싫다면서도 왜 그의 부탁을 다 들어준 건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면 바로 이것이 윌리의 지배 방식이기 때문이다. 미시와의 대화를 정확히 옮길 수는 없지만 미시가 콜레트에게 “목줄이 느슨하게 맸다고 목줄을 매지 않은 건 아니다”라고 지나가듯 말하는 장면이 있다.
콜레트가 윌리를 사랑했냐는 진위와는 별개로 콜레트의 삶으로부터 그동안 여성을 ‘제2의 성’으로, 남성의 결핍으로 지배하기 위해 가부장제 사회가 사용했던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스스로를 마주하고 자기 자신이 되어 살아가는 후반부의 삶은 그다지 성공적이진 않다.
레즈비언이라고 손가락질받고 끝까지 믿었던 윌리에게 사기를 당한다. 콜레트의 삶이 그렇게 아름 답지 않아 보일 때쯤 우리는 무대 위에 올라선 콜레트와 눈을 마주친다. 올곧이 응시하는 눈에 반사된 나는 실화였던 이 이야기에, 콜레트의 삶에서 그가 받아왔던 여러 시선들을 추측하고 이내 부끄러워진다.
'남자 없이도 이렇게 잘 살아'는 (세계를 지키는 어느 사람의 말처럼) 스스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얘기하며 다짐해본다.
(+)
워시 웨스트모어랜드 감독이 오랜 기간 준비해온 만큼 삶을 따라가는 속도와 아름다운 미장센이 좋고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만큼의 연기를 보여준 키이라 나이틀리가 좋다. 영화가 아니었다면 모르고 살았을 콜레트를 만날 수 있어서 벅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