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작은 아씨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관람을 마치고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을 읽기 시작했다. 조가 아닌 그레타 거윅을 상상하며. 그랬더니 이야기를 따라가기보다는 솎아내며 읽게 된다. 그가 무슨 장면을 선택했고 어느 대사는 생략했는지에 대해 그려본다. 영화를 두 번째 관람한 후부터는 더 수월하게 추적할 수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영화, <작은 아씨들>
*원작 루이자 메이 올컷의 소설은 ‘작은 아씨들’로, 2019년 그레타 거윅의 영화는 <작은 아씨들>로 표기했습니다.
영화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원작에 대한 얘기를 잠깐 하겠다. ‘작은 아씨들’은 1, 2부-한국 번역본으로는 무려 900쪽이 넘는-대서사시로,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실제 삶을 모티브로 한다. 소설 속 마치 네 자매 중 작가는 자신이 둘째 조였음을 명확히 한다. 너무도 잘 알려져 있듯, '작은 아씨들'은 주인공 조를 중심으로 마치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며 미국 사회가 지금까지 쭉 강조해온 가족이라는 가치에 부합하는 고전 명작이다. 또한 (1부 전반에 걸쳐)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구성원+시골 마을이라는 공간적 배경+그중 가장 ‘여성스럽지 못한’ 조가 주인공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배경인 19세기 시대 아래에 충돌하는 지점이 흥미로운 소설이다.
‘작은 아씨들’에는 가족과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따스한 시선과 맑은 영혼이 담겨있다. 소설을 천천히 읽다 보면 조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유년 시절을 함께 지나가는 듯하다. 원작을 읽지 않은(혹은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영화를 우선 관람하고 소설을 읽는 걸 추천한다. 영화의 여운을 지닌 채로 책을 읽다 보면 영화를 분명 다시 보고 싶어 질 것이다.
나는 ‘작은 아씨들’을 그레타 거윅의 눈에서 보고 싶었다. 핵심적으로는 ‘19세기에 만들어진 고전 소설을 왜 다시 이야기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적어도 나에게 그레타 거윅은 ‘지금 당장’의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현시대 미국 청춘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왜 19세기로 카메라를 돌렸을까. 영화 자체와는 별개로 가졌던 나의 관심은 사실 영화 <작은 아씨들>과 깊이 얽혀있었다.
그레타 거윅은 1800년대를 살았던 네 자매의 삶을 지금 다시 조명했다. 이유를 묻는 나에게 그는 영화 자체로 답한다. 지금의 <작은 아씨들>은 오직 그레타 거윅만이 가능하다.
작은 아씨들은 이야기이다.
정확히는 19세기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여성작가가 쓴 자전적인 소설을 다시 불러오는 주체가 같은 여성일 때, 자신의 삶을 예술로 남기는 여성들은 줄곧 단절되어 있던 실을 잇는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세상과 나를 여성의 눈에서 인식해 온 역사이다.
쓰고 있긴 하지만 중요하진 않은 글일 뿐이라고 말하는 조에게 에이미는 이렇게 말한다. 쓸 필요가 없는 글이 아니라 쓰지 않기 때문에 중요해 보이지 않는 거라고. 계속 써야 중요해지는 것이라고.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소설 ‘작은 아씨들’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에서 비롯된 부족한 점도, 아쉬운 점도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나는 조의 작가 커리어를 열렬히 지지한 탓에, 결말이 100% 해피 엔딩이라곤 못하겠다.- 하지만 <작은 아씨들>의 여성들은 살아 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만 다투고 또 바보 같은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세상의 고통과 차별을 바꿀 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각자의 태도와 선택으로 각자의 삶을 가진다.
소란했던 시대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여성들이 살았었다. 여성 영화는 꾸준히 지워진 여성의 삶을 조명한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영화들을 사랑하며 내 인생을 보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이 했던 말을 요즘 자주 떠올린다. 내가 사랑하는 영화에 대해, 나를 사랑하는 영화에 대해.
네 자매를 응원하고 나도 모르게 눈물도 흘리며 영화에 흠뻑 빠졌던 2시간을 생각한다. <작은 아씨들>은 나를 사랑하는 영화임이 틀림없다.
<작은 아씨들>은 영화의 안팎을 ‘시간과 응답’으로 건설했다. 원작과 달리 영화에선 현재와 과거가 교차한다. 뉴욕에서 글을 쓰는 현재의 조가 네 자매와 함께 자랐던 과거를 회상하며 진행된다. 교차하는 방식이 자연스러워 때론 과거의 사건과 현재가 인과관계처럼 영향을 주고받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원작의 방대한 서사를 조금이라도 더 유연하게 연결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밖도 그러하다. 조는 자신의 소설 ‘작은 아씨들’의 결말과 판권에 대해 편집장과 대화한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로 조를 설득하는 편집장의 논리는 빠르고 리듬감 있는 시간 교차로 인해 우스꽝스러워진다. 조는 분명하게 선택한다.
책이 잘 팔리기 위해 자신의 여주인공을 결혼시켜야 한다면, 내 이야기는 내가 갖겠노라고.
그레타 거윅은 ‘작은 아씨들’을 통해 지금의 21세기에 응답한다. 그러면서도 조의 서사를 보충하여 시대적 배경의 한계, 원작 자체의 한계에 현재 페미니즘적 시선을 집어넣었다. 그레타 거윅은 시대의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그 시대를 살아냈던 여성의 존재를 성공적으로 불러내어 반드시 ‘이야기되어야만 하는’ 필요를 증명했다.
베스의 죽음 후, 써왔던 글들을 태우다 조는 다시 펜을 잡는다. 그의 얼굴엔 결연함이 깃든다. 그건 아마 카메라 뒤에 선 그레타 거윅의 얼굴이었으리라.
네 자매가 함께 있을 때 들었던 호탕하고 유쾌한 웃음소리를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 원작의 방대한 양을 두고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때, <작은 아씨들>은 인물을 납작하게 만드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네 자매가 차례로 등장하는 오프닝에서부터,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은 매그와 베스의 서사를 세심하게 배치했다. 대사 하나에도 베스의 다정함이, 한 장면에도 매그의 갈등이 느껴진다. 후반부는 세 사람의 감정선 위에서 진행되는데 누구의 시점에서 보더라도 이해될 만큼 설득력 있다. 족히 열 명은 되는 주요 등장인물들이 카메라 안에 들어왔다 나가는 과정이 산만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심지어 등장인물 모두가 존재감이 넘치는데 말이다.
배우들의 공이 크다. 가능한 가장 완벽한 캐스팅이 아닐까 싶다. 특히 에이미를 맡은 플로렌스 퓨의 능력을 알면서도 놀라웠다. 정말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막내 에이미를 탁월하게 연기한다.
대부분이 조를 ‘최애’ 캐릭터로 뽑는다. 실제 작가의 페르소나이자 주인공이기 때문에 당연할 수도 있겠다. 남들과 다르게 털털하고 자기 자신을 인생의 중심에 두고자 하는 인물이라는 이유도 클 것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나 또한 어렴풋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조는 좀 더 복잡하다. 조는 자신의 엉망진창인 성격을 매번 고민하는 인물이다. 어머니와 대화하며 반성하다가도 갑자기 화를 내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 모든 걸 잃었을 때 후회하고 뒤늦게 결정을 돌리려다 상처를 입기도 한다. 영화는 조의 그러한 면을 지우거나 마냥 ‘사랑스러운 말괄량이’로 그리지 않는다. 그는 완벽하진 않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는 사람이다. 조는 그간 그레타 거윅이 연기로 보여준 인물들과 닮았다. 그렇기에 조는 주인공이기도, 발화자이기도 하지만 감독이기도 하다.
영화는 정성스레 바느질한 베스의 실내화 같다. 이 영화와 함께라면 분명 어느 겨울이라도 견딜 만할 것이다.
인간은 분명 추억을 먹고 산다. 왜 그때는 소중한 걸 몰랐을까 대답할 수도, 미리 알려줄 수도 없는 질문이 평생을 따라다닌다. 뻗으면 닿을 것 같지만 결코 닿을 수 없다. 그리하여 영원히 추억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시리게 푸른 현실과 달리 모두가 함께했던 과거는 늘 따뜻한 노란색을 닮았다.
<작은 아씨들>은 ‘어떤 식으로든 끝나게 되어 있는’ 유년 시절과 그 시절을 함께 한 사람들을, 나를 기억하는 영화이다. 당차게 미래를 그리던 조는 끝나가는 유년과 마주하는 이별을 유독 못 견딘다. 언니 메그에게 몰래 털어놓았던 조의 불안함을 아마 겪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매들끼리 서로 미워하고 있을 시간이 없듯’ 후회만 하며 살 수는 없다. 조는 가장 힘든 순간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성장하는 조의 유년 시절은 끝이 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지나간 세계를 기억하고 추억한다.
제일 마지막, 완성된 ‘작은 아씨들’을 보는 조의 모습 사이에 어떤 장면이 들어가 있다. 모든 건 그 짧았던 삶의 한 장면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