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스페리아>
<서스페리아>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ACT 01. 동참하시죠, 고난의 여정에
리메이크가 아류작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왜?”라는 질문에 마땅히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한 편의 영화는 -완결성과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 완성된 작품이다. 한 영화는 그 속에서 한 세계를 탄생시키며 종말 시킨다. 작품을 탄생하게 한 모든 요소를 뭉뚱그려 세계의 창조자라고 한다면 리메이크는 ‘세계를 창조자로부터 분리하기’이다. 리메이크로 인해 (영화의) 세계는 새로운 창조자를 만난다.
만남에 앞서 리메이크가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앞서 이야기한 “왜?”라는 질문은 관객보다는 세계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훌륭한 리메이크는 원작의 세계에게 ‘왜 새로운 창조자를 만나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합의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리메이크가 원작을 이어받아야 함을 의미하진 않는다. 이전의 창조 방식과 달라진다면 더욱 원작의 세계가 반드시 새롭게 창조-리메이크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해와 이유 없이 가져오는 리메이크는 원작의 세계를 어디서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르는 애물단지로 취급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방식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왜 반드시 리메이크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잠자고 있던 세계를 깨워 창조라는 고난의 여정에 동참하길 요청한 자들의 마땅한 도리이자 의무이다.
영화 <서스페리아>(2019)는 77년 이탈리아 공포 영화 장르인 지알로 필름의 대표 작품인 다리오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1977)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지알로 필름은 강렬한 원색의 미쟝센, 자극적인 음악과 스토리를 이용하는, 말 그대로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공포 장르이다. 장르 양식이 부각되는 지알로 필름은 스토리의 인과성과 구조를 치밀하고 촘촘히 구성하기보다는 영화를 보고 즐기는 쾌감을 제공한다.
ACT 02. 아무튼 즐기시라
이렇게까지만 설명하면 루카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 관객들은 혼란스럽다. 2019년 리메이크 영화는 짜릿한 쾌감은커녕 어려운 말들이 가득하며 스토리는 또 엄청나게 꼬여있는 것 같다. 공포영화는 응당 ‘무섭고 스릴 넘쳤다. 재밌었다. 끝!’이어야 하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어쩐지 슬프고 처연하다. 무려 3시간인 <어벤져스: 엔드 게임>도 버텼는데 2시간 30분 정도는 당연히 가능하다며 선택한 게 후회된다.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루카의 <서스페리아>는 원작을 따라가지도 공포 장르를 강조하지도 않는다. <서스페리아>는 복잡한 텍스트들을 복잡함 그대로 교차하여 촘촘히 쌓은 영화이다. 두 가지 세계를 잇는 방식은 직접적이면서도 몰아쳐서 사전 지식이 없으면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관객들이 감독이 전하려는 의도를 백 퍼센트 헤아릴 필요는 없다. 영화의 감상은 오로지 관객과 영화 사이의 행위이며 그 두 주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은 철저히 내밀하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 OOO 해석’을 찾아보게 만드는 영화가 무조건 좋은 영화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해하지 못했다고 자책하지 말자. 그저 당신이 영화와 나눈 어떤 것들이 어떻든 즐기시라.)
ACT 03. <서스페리아>는 복잡한 텍스트들을 복잡함 그대로 교차하여 촘촘히 쌓은 영화이다.
<서스페리아>는 원작의 스토리를 표면 플롯으로 설정한다. 미국 소녀 수지는 무용을 하고 싶어서 독일의 무용 아카데미를 찾는다. 오디션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합격하여 단숨에 메인 댄서의 자리에 올라가며 마담 블랑의 신임을 받는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선 계속해서 의심스러운 사건들이 벌어지며 수지는 이상한 소문을 듣는다. 아카데미는 마녀의 소굴이라는 것. 역시나 마담 블랑을 비롯한 아카데미 선생들은 마녀였다. 마녀들은 젊은 무용수들을 이용해 악마에게 바칠 재물을 모색하고 있던 것이었다. 재물로 선택된 수지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채 마지막 의식에 참여한다. 영화는 수지를 따라가며 무용 아카데미에서 느껴지는 기괴함과 자신을 덮쳐오는 이상한 기운들, 이후에 벌어지는 충격적인 파국을 초자연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세계로 인도한다.
동시에 페트리샤와 클렘퍼러의 서사를 촘촘하게 끼워 넣음으로써 설정하는 메인 플롯은 <서스페리아>를 원작과 전혀 다른 영화로 만든다. 무용 아카데미로부터 빠져나온 페트리샤는 정신분석 박사인 클렘버러에게 상담을 하며 마녀 이야기를 하지만 클렘퍼러는 그녀의 망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페트리샤가 사라지고 그녀의 다이어리를 본 후 경찰에게 요청 하지만 실패하고 직접 무용 아카데미를 찾아간다. 그 후 의도치 않게 마지막 주술을 목격하게 된다.
메인 플롯은 <서스페리아> 속 1977년, 독일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집중한다. 영화는 1977년 ‘독일의 가을’과 *적군파들의 테러, 68혁명을 거슬러 테러리즘, 나치즘을 방조한 세대를 향한 단죄, 부끄러움과 참회의 역사적 시각을 ‘무용 아카데미’ 속 사회를 표면에 위치시켜 전달한다. 첫 장면이 적군파의 대표 바더 마이노프를 석방시키라는 시위일 만큼 영화는 노골적으로 단언한다.
이 이야기는 무용 아카데미와 수지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 적군파 : 68혁명 이후 바더와 마인호프는 극좌 테러집단 적군파를 결성하여 자본주의 타도를 테러라는 무력의 방식으로 과격하게 진행하였고 서독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 넣었다. (출처 : 독일사, 권형진, 2005)
2시간 30분의 러닝 타임 동안 교차하고 중첩되는 두 세계는 복잡한 듯 보이지만 정확히 대입된다. 무용 아카데미는 독일 사회, 선생들은 나치이며 권력자로 볼 수 있다. 투표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의견을 배척하며 리더로 결정된 마르코스를 추종하며 의심을 갖지 않는다. 마르코스 공연 이름 ‘Volk’는 민중이라는 의미이다. 무용수들은 무용 아카데미에 있으면서 춤을 추지만 춤은 사실 악마를 숭배하는 의식이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무용수들은 의식을 행하는 데에 이용되며 권력자들에 의해 착취당한다.
ACT 04. 어둠에서 피어난 한숨은 눈물을 감싼 채로
<서스페리아>는 세대 분리에서 시작하여 대비하는 영화이다. 원색의 대비, 지상의 수지의 무용에서 비롯되는 지하의 불신의 저주 등의 시각적 대비는 강렬하다. 상징과 가치의 대비 또한 뚜렷하다. 이전 세대와 현재 세대, 과거와 비롯된 현재, 여성과 남성, 단죄와 구원, 죄책감과 부끄러움 등. 영화는 대비의 방식으로 거짓된 마르코스를 제거하고 진정한 어머니, 마더 서스페리룸으로 자리하는 수지와 그녀가 내리는 처벌, 그리고 안식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극단적 테러가 자행되는 시기적 상황에서 젊은 세대들이 가지는 나치를 행했던 이전 세대에 대한 격렬한 분노,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설파한다.
단죄와 구원을 구분하는 대비는 무용 아카데미의 마지막 의식, 수지가 진정한 마더 서스페리룸으로 자리한 후 행해지는 충격적인 후반 장면에 돋보인다. 수지는 마르코스와 그 일당을 단호하고 잔인하게 처벌하면서도 그들에 의해 희생되어야만 했던 페트리샤를 비롯한 이들에게 “그토록 원했던 편안한 죽음”이라는 안식을 내린다. 또한 무력한 목격자인 클렘퍼러를 찾아가 아내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줌과 동시에 그의 기억을 지움으로써 자신의 세계와 분리시킨다.
후반 장면은 원작 <서스페리아>의 잠자고 있던 세계를 호명하여 새로운 세계로, 루카 구아다니노의 세계로 끌어들여야만 했던 가장 큰 이유이다. 감정의 메시지를 시각과 음악 그대로 전달한다.
충격적이고 끔찍하면서도 아름답고 슬프다.
억눌린 본성이 폭발하며 탄생하게 된 강력한 힘은 분명 악마의 것이다. 하지만 악마의 심판은 정확하다. 분노는 정확한 대상을 향하며 안타까운 이들에게 쓰다듬는 손짓은 처연하다. 설령 비극일지라도 수지는 심판하고 처벌한다. 모든 것은 끝나야 새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지와 세계는 단호히 마무리 지음으로써 비로소 시작한다.
마땅히 느꼈어야 할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반성하지 않은 과거의 세대들에 대한 심판은 영화 속에서나마 이루어진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세대들을 위한 위로와 몫을 남겨두며 말이다.
어둠에서 피어난 한숨은 눈물을 감싼 채로 응시한다.
대답해야 하는 자는 말이 없고 고통받은 자는 쓰러져야 했던 지옥에서 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악마가 되어 심판한다. 생각해보면 잊히고 지워진 목소리들을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건 닿지 않는 하늘이 아니라 밟고 서 있는 지하일지도 모른다.
ACT 05. 어쨌든 ‘루카계’
그의 전작들과 비교가 곤란해 보이기는 하나, 잘 들여다보면 ‘루카’의 향기가 짙은 영화임은 틀림없다. 많은 사랑을 받은 <아이 엠 러브>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나란히 놓고 봐도 그러하다. <서스페리아>는 분명히 두 영화와 함께 ‘루카계’(루카 구아다니노의 세계)을 공유한다.
<콜바넴>의 첫 장면은 엘리오가 자신의 집에 온 올리버를 보는 장면이다.
어딘지 삐뚤린 소년은 번듯한 손님을 얼핏 보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L’usurpateur.”(찬탈자다) 낯선 이의 침투는 ‘욕망’의 시초가 된다. 욕망은 영화마다 파란색, 보라색, 빨간색 등 다른 색을 띠지만 감독의 작품을 관통하는 가치이다. 루카 구아다니노는 인터뷰를 통해 어릴 적부터 원작 <서스페리아>에게 매혹되었음을 여과 없이 표출했다.
사랑을 그리며 육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방식을 애용하는 그를 봤을 때, <서스페리아> 역시 육체에 주목하며 원작의 매혹됨을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는 육체로서의 육체, 여성의 육체, 역사를 지닌 육체를 바라본다. 영화 속 안무들이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유는 그가 육체를 바라보는 시선에 있다. <서스페리아>가 좋은 작품이냐 안 좋은 작품이냐를 떠나서 감독은 원작의 세계를 정중히 초대해 자신의 세계로 이끌었다.
ACT 06. 볼까 말까 할 땐 일단 봐라
<서스페리아>의 리뷰를 준비하며 “많이 무서워요?/많이 잔인한가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해당 리뷰를 끝까지 읽으셨다면 영화를 봤을 확률이 높을 텐데, <서스페리아>를 봤다고 한다면 질문을 많이 받을 것이니 대처하는 법을 알려드리겠다. 상황은 두 가지이다.
(1) 원작을 본 사람 (2) 원작을 보지 않은 사람.
(1)의 사람들을 면밀히 살펴본 후 77년 <서스페리아>를 좋아하는 것 같아 보이면 조심스럽게 말하자. “원작이랑 아예 다른 영화라고 생각하면 좋을거야.” (2)의 사람들도 나뉠 것이다. 공포, 호러, 오컬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일단 니가 좋아하는 잔인하고 피 튀기는 장면들은 나와. ‘일단은’ 말이지.” 공포를 좋아하지도 원작 <서스페리아>도 모르지만 콜바넴 ‘그 감독’만 아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해보자. “예고편 보고 와.”
...이러면 모두에게 추천을 하지 않는 영화가 아니냐고? 이 상황의 포인트는 당신의 마지막 대사에 달려있다. 망설여하는 상대방을 쳐다보자. 틸다 스윈튼처럼 웃는 듯 아닌 듯 매혹적인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상대방에게 슬쩍 대사를 던지자. “근데 볼까 말까 할 땐 일단 보는 게 좋지 않겠어?”
그렇게 당신의 수법에 영업 당한 상대방과 함께 <서스페리아>를 볼 것을 추천한다.
영화 평론가 이동진은 이 영화의 소개에 앞서 이렇게 이야기 했다. “어떤 영화는 감성보다 지성이 필요하다.” <서스페리아>를 다시 본다면 처음에 느꼈을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감상이 조금은 바뀌며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EPILOGUE. 알쓸신잡 <서스페리아>편
(출처 : 씨네 21)
◀ <서스페리아>의 음악 감독은 영국 밴드 라디오헤드의 보컬인 톰 요크이다. 이 영화는 톰 요크의 데뷔작이다.
◀ 틸다 스윈튼은 <서스페리아>에서 1인 3역을 연기했다.(마담 블랑, 박사 클렘퍼러, 그리고 최종 빌런!) 감독은 “인간 본성의 세 가지 측면, 이드와 에고, 슈퍼에고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배우는 틸다 스윈튼뿐”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이는 단순히 그녀의 연기가 뛰어남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맡은 세 가지 역할-인간의 세 가지 층위의 본성은 어딘가 대응하는 측면이 분명 존재함을 암시하는 말이다.
◀ 원작 <서스페리아>에서 ‘수지’를 연기한 제시카 하퍼는 이번 영화에서 클렘퍼러의 아내 앙케로 출연했다.
◀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13살 때 <서스페리아>를 보고 반드시 영화 감독이 되어서 <서스페리아>를 자신만의 버전으로 찍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 후 2007년 판권을 획득했지만 리메이크는 계속 좌절되었고 <아이 엠 러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등을 찍고 나서야 40여 년 만에 <서스페리아> 리메이크라는 꿈을 이뤘다. (40년 덕후는 세상을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