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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크 Mar 01. 2019

살아 숨 쉬다 못해 폭발하는 욕망들의 파티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살아 숨 쉬다 못해 폭발하는 욕망들의 파티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영화는 그간 비교적 주목받지 못했던 18세기 영국 앤 여왕의 집권 시기를 다룬다. 시대극으로 <더 페이버릿>을 보는 측면에서 오는 재미가 분명 있다. 우선 영화의 내용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이다. (영국과 프랑스 전쟁 상황, 여당과 야당의 정치적 대립, 주인공 세 사람의 대부분의 사건과 관계까지) 그다음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시대극을 대하는 방식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궁전이라는 공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소 왜곡되어 보이는 카메라를 사용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한정된 공간을 넓게 인식할 수 있으며 때로는 궁전 속 개인이 더욱 작고 하찮게 보인다. 마지막으로 철저히 아름다운 의상과 소품, 미장셴은 살아보지 않은 18세기 영국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시대극 <더 페이버릿>을 관람할 때 모든 역사적 사실을 미리 확인할 필요는 없다.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상황이라는 것만 기억해도 좋다. 이 영화는 시대극을 표방한 열렬한 멜로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하고 상처가 깊은 영국의 여왕 ‘앤’은 왕이라는 높이에 어울리지 않는 유약한 사람이다. 그를 바치듯 잡고 서있는 것은 ‘사라’. 둘은 오래전부터 함께 해온 친구이자 연인이다. 귀족이었던 ‘애비게일’은 한순간에 몰락하여 하녀로서 궁전으로 들어오게 된다. 궁전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들어온 사람으로 인해 불어 닥치는 폭풍 같은 변화. 세 사람은 각자의 ‘favorite’을 마음속에 품은 채 폭풍의 궁전 속에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더 페이버릿> 세계의 'favorite'-즉 욕망은 크게 두 가지, 사랑과 권력이다. 욕망은 영화의-어쩌면 삶의-단골 소재이다. <더 페이버릿>은 결국 '욕망'만을 말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새롭다. 영화 속 욕망들은 충돌하고 비틀리고 변하며 무섭게 가까워졌다가 영영 만날 수 없는 먼 곳을 향한다. 세 명 모두에게, 그것도 아주 고요하고 우아하게 말이다. 정신없이 욕망의 변주를 따라가다 보면 <더 페이버릿> 세계의 게임과 함께 영화는 끝나 있을 것이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더 페이버릿>은 세 사람의 ‘favorite’이라는 욕망이 변화를 향해 출발하는 순간과 각각의 'favorite'이 만나는 순간, 그리고 찰나의 접점을 뒤로 한채 영영 만날 수 없게 떠나는 순간을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영화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지점은 크게 세 번이 있다. 애비게일이 궁전으로 들어오게 되는 오프닝, 사라가독초를 마시고 낙마하는 중간 지점, 그리고 엔딩 장면이다. 그리고 '욕망'과 함께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단어는 '고통', '거짓말'이 있겠다.




앤의 욕망은 사랑에서 권력이다. 아이가 한 명씩 죽을수록 자신의 몸의 일부 또한 사라진다고 말하는 앤은 상처에 약한 사람이다. 사랑의 주도권이 사라에게 있는 상황에서 앤은 더욱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그런 앤에게 애비게일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두 사람은 사라에게는 없는 고통을 공유하게 된다. 애비게일이 맨 처음 말에서 떨어져 진흙을 묻혔던 것처럼 앤 또한 사라와의 첫 만남이 말에서 떨어진 것이며 사라에게 화장 때문에 얼굴이 엉망이 되었다고 질책받기도 한다. 앤에게 애비게일은 달콤한 케이크와 같다. 애비게일의 칭찬과 관심에 앤은 달콤하게 취한다. 사라가 없는 사이 애비게일의 결혼을 이루어줌으로써 앤은 자신의 또 다른 고통의 원천이었던 '여왕'자리가 할 만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간 사라의 뒤에서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던 앤이 권력의 맛을 느끼고 결국 사랑하는 사라를 여왕이라는 직위로 내치게 된다.




앤의 'favorite'은 고통이 원동력이다. 다시 말하자면 욕망이 있는 한 고통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앤은 세 사람 중 처음부터 끝까지 고통스러운 사람이다. 사랑을 욕망할 때에도, 권력을 욕망할 때에도 그녀는 다른 고통에 아파한다. 사라를 궁전 밖으로 내쫓기 위한 애비게일의 거짓말을 받아들이고 끝내 사라의 진심이 담긴 편지가 앤에게 닿지 못했을 때 우리는 느끼게 된다. 결국 욕망이란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주체할 수 없이 나아가 자신을 잡아먹게 된다고.










 사라의 욕망은 권력에서 사랑이다. 에필로그에서 앤과 사라의 대화는 그들이 생각하는 사랑을 말한다. "사랑에도 한계가 있어." 하지만 국가의 안위라면 목숨-남편의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다고 말하는 사라는 세 사람 사이에서 가장 솔직한 사람이다. 또한 사라는 앤과 애비게일이 공유하는 고통이 없다. 영화 초반 그녀는 권력도, 사랑도 모두 쟁취했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관계의 변화를 일으킨다. 고통으로 인해 앤과 애비게일은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사라는 독초-낙마 사건으로 비로소 '고통의 공유'에 합류하게 된다. 구토와 떨어짐의 공유는 사라에게 애비게일의 야망을 앤의 아픔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그 이후로부터 사라의 ‘favorite’은 권력에서 진정한 사랑이 된다.

사라는 거짓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건 사랑이 아니야.” 사라는 앤에게 오소리 같다고 말할 수 있고 성을 선물해준 앤에게 비난할 만큼 솔직하다. 애비게일의 거짓 사랑에 대처하는 사라의 무기는 정직한 사랑이다. 오래전부터 쌓아온 앤과의 추억을 무기로 대처한다.




하지만 이 솔직하고 진정한 사랑은 정작 중요한 순간에 힘을 발하지 못한다. 앤은 애비게일의 거짓 사랑에 손을 들어줬고 사라는 궁전을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사라는 권력도 사랑도 잃은 것 같지만 게임의 승리에 도취한 애비게일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 둘의 게임의 목적은 달랐다"라고.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 사라의 말이 옳았음을 깨닫게 된다.











애비게일의 욕망은 권력이다. 애비게일의 원동력은 역시 고통이다. 귀족에서 몰락해 하녀가 된 애비게일은 오로지 자신이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해 온 몸을 바친다. 거짓말은 애비게일의 상징이자 무기이다. 사라는 애비게일을‘거짓말쟁이’라고 말하고 애비게일 스스로도 거짓말쟁이임을 숨기진 않는다. 애비게일의 거짓말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무기이다. 애비게일은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거짓말을 무기로 이용한다.



“나는 내 편이야, 언제나.”




나머지 두 사람이 욕망의 변화에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애비게일은 자신의 유일한 욕망을 성취한다. 하지만 성취하는 순간 그녀 역시 욕망에 빠져 허우적대기 시작한다. 욕망이 이루어진 뒤에 밀려오는 무력감이 그것이다. 사치를 부리고 마음껏 누려보려 해도 결국 나오는 것은 구토이다. 영화 내내 자기 자신을 거짓말로 포장하던 애비게일은 깨닫는다. 자신의 욕망에서 시작한 이 관계는 절대 끝날 수 없음을. 마음껏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앤이 자신을 짓누를 때 말이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엔딩에 나오는 것은 앤과 애비게일, 그리고 토끼뿐이다. 하지만 긴 디졸브에서 앤과 애비게일은, 그리고 관객들은 그 장면에는 없는 한 사람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앤에게는 더 이상 잡을 수 없는 사랑이자, 애비게일에는 모든 것을 이뤘지만 결코 잊을 수 없음으로써 졌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대를.


관객들은 앤과 애비게일의 엇갈리고 텅 빈 시선을 통해 <더 페이버릿> 세계의 진정한 게임의 승자는 누구일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영화 <더 페이버릿> 을 보고 나면 욕망의 폭발하는 운동성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영화 속 애비게일은 파티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무 늦어서도 안되고 또 너무 빨리 오면 재미없다"라고. 욕망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조금만 빨라도 또 조금만 늦어도 어긋나는 타이밍. 화려한 외면 속 끝내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무력. 그럼에도 멈출 수 없어 폭발하는 거짓의 달콤함.





궁전 안에서 쉴 새 없이 벌어지는 욕망들의 파티, 초대장은 영화 <더 페이버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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