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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크 Apr 03. 2019

그림자의 슬픔은 들리지 않는다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그림자의 슬픔은 들리지 않는다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가질 수 없을수록 탐나고 아름답고 아까운 마음을 알 것이다. ‘현실이 시궁창’이라면 더욱이. 평범한 유치원 선생님 리사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속해서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리사에게 평범함은 ‘시궁창’이다. 평범함은 공허함으로 이어진다. 리사는 공허하다. 삶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선생님으로서 역할만 가득하고 ‘리사’는 없다. 


리사는 언제든 내가 아니어도 괜찮은 대체 가능한 삶, 그림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허함과 권태의 ‘그림자’ 리사가 동경하는 건 시, 예술이다. 그런데 시가 어디 그냥 예술인가. 예술의 난이도를 매기는 것도 웃기지만 어쨌든 시는 그야말로 천재들의 영역이다. 

간절해도 안 되는 게 있다.

 누구보다 예술을 사랑하지만 정작 리사는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가질 수 없다. 시는 일상의 공허함을 채워주기 보단 오히려 자신이 평범하다는 걸 지독히도 깨닫게 한다. 그럭저럭한 시를 쓰고 맹맹한 피드백을 받는 것도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다. 심지어 주변 인물들은 리사를 이해하지 못한다. 예술과 지적인 삶을 동경하는 리사에게 고개는 끄덕여주지만 별로 관심 없는 남편, 자신이 원했던 방향과 정반대로 자라는 자식들.


그렇게 잠식되어가던 그의 귀에 들리는 건 목소리. 시를 읊는 목소리다. 우연히 듣게 된 지미의 시에 자신도 모르게 시를 옮겨 적는다. 시 수업에서 그 시를 발표한 리사는 한 번도 받은 적 없던 칭찬을 듣는다. 자아는 타자의 인정으로 실현된다. 남의 칭찬은 달콤하다. 리사는 지미의 보모에게 시를 옮겨 적을 것을 당부하고 본격적으로 지미와 시를 사이에 둔 관계를 이어나간다.


 지미에 대한 리사의 감정은 복합적이다. 순수한 감탄으로 시작하여 천재성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동일시의 욕망을 시도하다 이내 자신과 같은 ‘그림자’가 될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발굴되지 않은, 그리고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발견해주지 않을 것 같은 천재성은 리사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시킨다. 이 작은 아이에게서 나오는 시를 나만이 알아본다는 생각. 더불어 이제는 아무도 취급을 해주지 않는 예술의 상실에 대한 안타까움. 하지만 지미가 내뱉는 시를 받아 적는 리사의 연필은 시와 더불어 욕심을 써내려 간다.


리사도 어쨌든 시를 쓰는 사람이다. 지미의 천재성이 탐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초반에는 지미의시를 자신이 쓴 것처럼 발표하고 과제를 지미에게 전달하며 동일시를 시도하지만 이내 실패한다. 첫 번째 이유는 리사라는 사람은 예술을 지키고 싶어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단순한 질투였다면 끝까지 지미의 존재를 숨기고 시 낭독회에 자신이 올라갔을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지미가 도구적으로 이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미의 ‘애나’는 리사가 아니었고 지미는 똑똑한 아이였다.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리사는 마지막으로 지미를 찾아간다. 이때부터 영화의 전반에 깔리던 서늘한 기운은 서스펜스로 돌변하는 장르를 매끄럽게 잇는다. 영화는 무시무시한 상황을 (아동납치잖아!) 어찌 보면 단호하고 빠르게 끝낸다. 

리사는 평범이자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그림자는 힘이 없다. 많은 주변인에게 시를, 지미를 외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리사의 의견에 동의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을까.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마지막의 마지막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지미의 외침은 충격적이다. 솔직히 마지막 장면 때문에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자신의 납치상황을 침착하게 알리던 천재가 한 순간에 그림자가 되는 것 같았다. 지미의 외침이 전달되지 않는 것은 비단 경찰차 안에 갇혀서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안타까움은 사라와 함께 엿보았던 지미의 재능이 사라의 말대로 사라질지도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리사는 두 번의 실패 -시를 쓰는 것과 지미에게 시를 쓰게 하는 것-를 하는데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이 실패들조차 너무 평범해서 슬펐다. 지금도 어딘가에 묻혀있을 꿈들이 떠오른다. 어쩌면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게는 꿈 무덤이 하나씩 있지 않을까. 리사와 같이 이름이 아닌 역할로서 살아내는 인생들이 있지 않을까.



리사에게 공감하지만 잘못되었다. 애초에 다른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는 없다. 리사는 자식들에게, 지미에게 자신의 꿈을 대신 이뤄주길 바란다. 나도 날 잘 모르는데 남은 얼마나 잘 알 수 있는가? 특히 자식은, 아이는 인형이나 도구가 아니다.

아들이 평범하게 자랐으면 좋겠다는 지미 아빠의 말이 꼭 틀린 건 아니다. 

천재의 비극이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신동이라고 발견된 천재들이 천재성을 잃는 경우는 너무나도 많다. “발굴”이라는 이름의 폭력성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천재성을 포함한 어떤 특성도 그것을 가진 주체보다 우선시 될 수는 없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한 사람으로부터 다양한 사유들을 이끌어낸다. 주인공의 행동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무작정 틀렸다거나 무작정 옳았다고 할 수 없게 한다. 

리사의 욕심은 애달프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슬픔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채워도 텅 빈 삶, 끝내 무너지고 마는 욕망, 가치를 잃어가는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비탄. 자신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부터 자신을 찾으려는 리사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건 나 자신을 향한 위로이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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