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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크 May 13. 2019

도덕도 배덕도 중요치 않은 이곳은 여성들만의 배틀 로열

영화, <에이프릴의 딸>

도덕도 배덕도 중요치 않은 이곳은 오로지 여성이 되기 위한 배틀 로열
영화, <에이프릴의 딸>


 17세에 임신을 하게 된 발레리아. 발레리아의 엄마 에이프릴은 두 딸들과 따로 떨어져 살던 중, 딸의 임신 소식을 듣고 발레리아를 찾아간다. 아이는 물론 출산 준비에 지친 발레리아까지 정성으로 보살펴주는 에이프릴. 평온한 날들도 잠시일 뿐. 영화는 에이프릴의 어떤 욕망과 행보를 서서히, 그리고 강렬하게 펼친다.

 <에이프릴의 딸>은 가부장제가 원하는 '진정한 여성되기' 신화에 포섭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며 역설적으로 가부장제 시스템이 만들어낸 여성성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반문한다.

 칸영화제 3관왕에 빛나는 미셸 프랑코 감독이 연출을 맡았으며 스페인 대배우 엠마 수아레스가 영화를 위해 직접 의상을 준비했다고 한다.  제70회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심사위원상 외 다수의 상을 수상하였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 참 거침없고 불친절하다. 감정도 연출도 절제되어 있다. 영화를 보는 가장 큰 욕망인 주인공과의 동일시도 거부한다. 끝까지 알 수 없는 전개와 캐릭터에 짜릿하기보다는 내가 뭘 보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럼에도 자꾸 생각나는 건 시종일관 영화에 묻어난 건조한 광기 때문이다.

내가 <에이프릴의 딸>에서 읽은 것은 여성성의 신화이다. "진정한 여성이 되는 것"의 신화 속으로 캐릭터들은 전진한다. 영화 속 사람들이 다 비정상인 것 같지만 영화의 세계를 신화의 작동으로 본다면 새롭게 읽히는 부분이 있다. 영화가 유달리 건조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영화 <에이프릴의 딸>이 한 편의 신화라면, 우리는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던 것이 말 그대로 '신화'임을 자각하게 된다. 여성이 자연스럽게 아내와 엄마가 될 수 있다고 믿는(되어야 한다고 믿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영화는 그 ‘정상가족’에 들어가기 위해 치열하게 고군분투하는 에이프릴을 보여주며 질문한다.


“진정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인가 만들어지는 것인가.

에이프릴이 딸 발레리아에게서 빼앗는 것은 마테오와 아이. 정확히 "진정한 여성됨"에 필요한 '아내되기' (섹슈얼리티)와 '엄마되기' (재생산 능력)이다. 이 두 가지 여성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만이 진정한 여성이 되며 비로소 정상가족 안에 포섭될 수 있다. 에이프릴의 결핍은 <자신의 남편과 정상가족 이루기>의 실패로부터 비롯된다.



에이프릴의 알 수 없는 행동을 우리는 도덕적으로 비난하게 된다. 그런데 영화 속 세계의 사람들은 어찌나 무던하고 덤덤한가. '캐릭터들이 원래 다 비정상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세계는 신화이다. 에이프릴을 '여성성'을 이루려는 도전자로 본다면 에이프릴에게 발레리아는 모녀 관계라기보다는 "진정한 여성되기"의 라이벌이자 경쟁자이다. 신화 속에서 도덕/윤리/감정/윤리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그러니까 에이프릴과 마테오 사이는 로맨스라고 보기 어렵다. 에이프릴은 마테오의 성기를 자주 언급하는 데 이는 에이프릴에게 마테오란 성기, 섹슈얼리티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엄마가 딸의 남편을 뺏어?라는 비난에서 괜히 한번 얘기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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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여성됨"은 곧 "정상가족"을 향한 열망이다.

그러기 위해선 아내와 엄마를 모두 수행해야 하니 둘의 균형과 조화는 마치 하나인 것처럼 불가분”해야”한다. 에이프릴의 행동을 모성 신화로만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마테오가 떠나니 아기도 곧장 버리는 그녀의 행동에서 알 수 있다. 왜 에이프릴은 애지중지하던 아기를 그렇게 빨리 포기했을까?

에이프릴이 열망하는 것은 아기에 대한 모성보다는 [마테오-아기-에이프릴] 그러니까 [아버지-아이-어머니]라는 정상가족의 구도에서 나오는 안정감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오로지 혈통으로서 이어지는 정상가족을 말이다. (혈통에 초점을 맞춘다면 에이프릴의 목적 달성은 오로지 딸들에게서만이 가능하다. 전개 초반 에이프릴이 첫째 딸 클라라에게 그토록 살을 빼게 하고 만나는 사람이 있냐며 묻는 행위를 생각해보자.)



발레리아의 엔딩은 의미심장하다. 에이프릴이라는 '신화를 쫓는 존재'의 답습이라고 본다면 신화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을 암시한다. 다시 시작되는 정상가족으로 들어가기, 완벽하고 안전한 여성 되기 신화의 시작. 또는 정반대로 볼 수도 있을 수도.



그렇다면 이 신화의 구조와 에이프릴의 고군분투에서 읽어 내야 하는 것은 지극히 페미니즘적이다.


굳건하다고 믿어온 정상가족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신화다. 허구적이며 위태로운 것이다. 아내와 엄마라는 여성의 성역할은 그동안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이것을 역할이 아닌 본성, 나아가 여성 그 자체로 규정해왔다.(그리하여 여성은 오로지 아내와 엄마로 축소되었다.) 가부장제가 원하는 ‘진정한 여성’은 이와 같은 신화에 의해 만들어진다.





여성영화를 열심히 접하는 나에게도 <에이프릴의 딸>은 결이 다른 영화였다. [젠더 규범이라고 부르는 성역할]과 [그것을 수행하는 인간]이 있다면 기존의 많은 여성영화는 성역할을 비틀거나 비판한다. 그런 영화들은 가부장제 시스템을 조망하거나 시스템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가시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목소리를 낸다.


 <에이프릴의 딸>은 그것을 수행하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가부장제 정상가족의 신화를 해체하지 않고 그대로 설정해둔 채 그 시스템 안으로 포섭되고자 고군분투하는 인간들을 그린다. 그럼으로써 가부장제의 거대한 신화를 신화로써 인식하게 한다. 우리는 <에이프릴의 딸>을 통해 여성성을 자연스럽게 공고히 하는 시스템을 바라보게 된다. 그 순간 자연이 된 신화는 깨지고 강력하지만 허구적인 껍데기만이 남는다. 영화의 어떠한 지점이 보여준 것을 받아 현실의 매끈한 표면에 균열을 내는 건 오롯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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