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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크 Oct 01. 2019

거스르며 그러나 만끽하며

영화, <성냥공장 소녀>

거스르며 그러나 만끽하며
영화, <성냥공장 소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프롤레탈리아 3부작 중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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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퀀스부터 재밌다. 성냥공장의 돌아가는 기계들을 길게 잡는다. 기계로 인해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성냥이 지루할때쯤 불쑥 노동자의 손이 침입한다. <공장에서 ‘뿅’하고 생산된 것 같은 물건들은 알고보니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꽤나 불편하게 한다. 자본 아래에 살고 있으면서도 인간을 향한 한끝의 존엄을 저버리지 못하기 때문일까.


영화는 계속해서 매끄러운 사회에 균열을 낸다. 잘 굴러가는 성냥갑을 멈추는 이리스의 손짓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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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는 하루종일 일을 한다. 불평도 없이 일하는 주인공을 보는 카메라는 집요하다. 실제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을 그대로 롱테이크로 담는다. 롱-테이크는 현실의 노동을 가감없이 반영한다.


이리스는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 구분없이 노동하는 여성이다. 카메라는 자신의 필연적인 권력으로 ‘사소한’ 노동을 생략하지 않는다. 사적인 노동과 공적인 노동의 균형을 잡는다고 볼 수 있겠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대중문화 재현에서 여성의 노동, 특히 가사 노동은 현실과 매우 다른 판타지가 된다. 예컨데 맞벌이 가정에서 육아와 가사노동은 엄마의 책임으로, ‘슈퍼맘’으로 미화된다.


혹은 엄마를 신화화할 때 가사노동의 고됨을 의도적으로 지운다. 하지만 이리스의 노동에서 알 수 있듯이 공장 노동만큼 가사 노동은 고되다.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카메라는 노동의 긴 시간을 체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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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에게 선택되고 싶은 욕망. 이리스는 섹슈얼리티에 적극적이다. 양부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어도 구매한 원피스를 입는다. 억눌린 욕망은 비집고 나오기 마련이다. 영화의 절정은 ‘흑화’한 이리스를 비켜보는 것일텐데 영화는 우리가 대중문화에서 자주 보던 ‘악녀’ 캐릭터를 비튼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기본적으로 금기시된다.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표출하는 여성은 악녀(혹은 마녀)가 된다. 그러나 곧장 실패하고 절망하고 사라진다. 오브제인 쥐약은 이런 의미에서 여성의 소멸을 안전하게 이루는 클리셰이다. 여성 캐릭터를 파멸시키는 영화는 쥐약을 아름답고 로맨틱한 죽음으로 꾸민다.


그러나 이리스는 이를 역으로 활용한다. 쥐약을 산 이후 관객들은 ‘이리스가 언제 눈물을 흘리며 죽게 될지’ 기다린다. 영화는 관객들의 기다림에 여지를 주며 비웃는다. 이리스는 쥐약을 먹지도 버리지도 않고 계속 들고 다닌다. 이쯤이면 ‘죽어야 할 시점’에 ‘죽여 버리는’ 여성. 이리스는 공간을 이동하며 복수한다.


공간이동을 수반한 복수의 궤적은 어떠한 지점을 거슬러 오른다는 느낌을 준다. 그는 스스로를 소멸시키려는 바다의 물살을 거스르며, 그러나 만끽하며 걷는다.


내내 감정을 절제하는 영화는 되려 이리스의 변화를 잘 표현한다. 어떤 사건을 전후로 완전히 뒤집혀도 원래 그랬던 거 마냥 그럴싸하다. 덧붙여 이리스는 성녀-창녀(혹은 악녀)라는 위치된 가부장적 이분법에 구속된 캐릭터가 아니다. 절제된 상황에서도 그가 행위의 주체로 보이는 까닭이다.


이리스는 영화 안에서-어쩌면 삶 전체에서- 오로지 한 가지의 목표만을 갖는다. 고작 사랑받는 것이 전부인 사람은 실패 이후 고작 복수하는 것이 전부인 사람이 된다. 가엾고도 단단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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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극장가를 가봤으면 좋겠다. 스크린에서 놀라울만큼 많은 여성들이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굳이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말이다. 얼떨떨하다가 아무나 붙잡고 소리치고 싶을 만큼 저릿하다. 1989년 영화 <성냥공장 소녀>를 다시 돌아보면 2019년 이후의 영화에 애정어린 기대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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