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틸 앨리스>
상실에도 기술이 있다면
영화, <스틸 앨리스>
2019.02.15 기록,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고 읽기에는 그다지 친절하지도 정보적이지도 않은 단상들입니다
상실의 기술이라니.
잘 잃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흔히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잃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앨리스는 모든 걸 다 가진 상황에서 오로지 ‘자신’만을 상실하기 시작한다. 초반의 앨리스는 상실의 파도를 막기 위해 노력한다. 알람을 맞추고 약속들을 기록한다. ‘자신’의 완전한 상실에 극단적인 대비책을 마련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쌓아온 방파제는 순식간에 휩쓸려간다. 그 중간에서 앨리스의 연설이 시작되면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상실에도 기술이 있다면, 그것은 ‘잃지 않는 것’이다. 휩쓸린 자리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그곳엔 여전히(still) 앨리스가 있다.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기억에, 앨리스의 순간순간에 앨리스는 분명 살아있다.
그렇지만 상실은 분명한 고통이다. 앨리스의 생애 일부를 따라가는 영화에 전해지는 고통이 있었다. 앨리스의 고통이기도 가족들의 고통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의 훌륭한 점은 그들의 고통이 결국 나에게 왔다는 것이다. 기억에 집착하는 나에게 상실은 상상으로도 괴로운 고통이다. 상실의 기술로선 기록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는 나에게 다른 깨달음을 주었다. 그리고 상실의 파도에 선 모두에게 가장 순수하고도 가장 이기적인 기도를.
설날에 뵈었던 할머니 생각이 난 것은 필연적이었다. 몇 년 사이 급속도로 악화되는 할머니는 작아지고 작아졌다. 예전에는 대화도 했던 것 같은데 이젠 이모들과 엄마에 둘러싸인 할머니를 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번 설날에는 할머니를 직접 경로당까지 모셔다 드린 적이 있다. 조심히 부축하는 과정에서 만져지는 할머니의 촉감이 낯설었다. 그동안의 무심함에서 순간 울컥였다. 경로당엔 너무 빨리 도착해버렸고 다시 사람들에 둘러싸인 작은 할머니가 있었다. 돌아오는 길엔 평소 하지 않았던 소원을 작게나마 빌었다.
앨리스와 마지막을 함께하게 되는 것은 막내 딸 리디아. (앨리스에게도 언니가 있었다. 그래서 이따금 보여주는 비디오의 두 여인이 앨리스 자매인지 리디아 자매인지 아니면 앨리스와 리디아인지 생각했다. 뭐 아무렴 어때) 리디아는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좋든 아니든) 나머지 앨리스와 갈등하기도 화를 내기도 한다. 변해가는 앨리스를 배려하기 위해 무척이나 신경쓰고 조심하는 가족들과는 조금 다른 감정으로 리디아는 앨리스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은 단순히 모성에 대한 보답이나 가족으로서의 책임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 이유는 앨리스와 리디아의 마지막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리디아의 이야기에 대한 앨리스의 단어를 꼭 들었으면 좋겠다.
서서히 상실해가는 기억 속에 오로지 남아있는 단어라면 앨리스의 삶 전체를 말하는 단어일 테니.
� 스틸 앨리스 (Still Alice, 2014)
� 드라마 / 미국 / 101분
� 리처드 글랫저, 워시 웨스트모어랜드
� 줄리안 무어(앨리스), 알렉 볼드윈(존 하울랜드), 크리스틴 스튜어트(리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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