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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크 Sep 30. 2019

펼쳐놓은 진실에 의심을 덧대어 믿음으로 재단하다

영화, <메기>

펼쳐놓은 진실에 의심을 덧대어 믿음으로 재단하다
영화, <메기>



확실한 건 <메기>는 증명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거예요.



“____”에 관한 영화.


☞믿음/의심/진실/선택



영화를 보고 나면 저 빈칸 안에 답을 넣고 싶겠지만요. 어떤 단어든 딱 맞아 보이진 않아요. 헷갈리거든요. 진실을 믿는 건지, 믿음을 선택하는 건지, 의심과 믿음이 실은 같은 건 아닐지. 그렇다면 후보들을 찬찬히 둘러보는 건 어떨까요.


진실


영화 속 하나의 전제는 “순수한 진실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메기>를 보며 무엇이 진실인지를 깨닫기보다는 진실(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편집되고 선택되는 과정을 지켜봐요.  


마리아 사랑병원 부원장 경진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믿을 사람은 믿고, 떠들 사람은 떠든다.” 경진의 모든 에피소드는 이 문장과 관련되었죠. 트램펄린, 엑스레이, 믿음 교육, 사과와 사슴, 그리고 고릴라 광고까지.



트램펄린과 고릴라 광고는 비슷하게 다가옵니다. 트램펄린 위 어린아이들의 행복한 얼굴. 그리고 바로 아래에서 따돌림당하는 어린 경진의 모습. 이 두 장면을 나란히 병치했어요. 아이들을 보며 미소 짓다가 카메라가 내려가 경진과 눈이 마주치면 경진만이 알고 있었을 과거의 사건을 듣게 돼요. 편집되고 편집되었을 다수의 ‘진실’은 따끔따끔하죠.


고릴라 광고는 찍는 과정과 실제 결과가 매우 달라요. 찍어놓은 장면을 되감기 하여 광고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입혀진 성원의 나레이션은 결과물을 정반대로 뒤집어버리죠. 갖다 붙였을 뿐인데. 그렇다고 이 모든 것들이 진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그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거죠. >우리가 보는 게 진실인가<에서 >그럼 진실은 뭐냐<에서 >진실이 그렇게 중요한가<로.


진실이 무엇이든 얼른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경진은 윤영의 고민에 대해서는 자신이라면 성원에게 직접 물어보겠다고 말해요. 그건 윤영이 진실에 더 빨리 다가가는 질문이면서도 윤영이 붙잡고 있었을 믿음을 단번에 잘라버릴 질문이기도 하죠.


의심


메기는 믿음을 검으로 의심을 방패로 전진하라고 했지만, 경진과 윤영은 의심을 무기로 ‘사과와 사슴’ 사건에서 성공해요. 그렇게 진지하게 했던 믿음 교육은 뒤로 한 채, 인물들은 의심하기 시작해요.


그런데 그들의 행동은 어딘가 부조리하고 이상합니다. 성원의 쎄한 표정은 그를 믿을 수 없게 하고 윤영의 의심은 이따금 과해 보이기도 하죠. <메기>는 관객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영화가 아닙니다. 주인공을 따라가면 퍽 쉽겠지만요. 관객들은 개별적으로 움직여야 해요. 누구의 선택을 믿을지를 말이죠.


그렇게 영화를 보다 보면 의심과 부딪히는 순간이 있어요. 보통 “무엇을” 의심할 거냐가 중요하잖아요. 사람을, 상황을, 진실을 등등. 그런데 ‘의심’에 주목하기 때문에 너무도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생각했던 의심이 낯설고 새롭게 느껴져요. 사람들은 이렇게 터무니없이 의심하다니. 또 말도 안 되는 의심들이 때론 도움이 될 때도, 부풀어진 의심에 뻥 터져버리기도 하다니.



톤과 유머는 밝아요. 미쟝센에 취하면 동화 같기도 해요. 그런데 <메기>의 사건들은 지독히 현실의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구멍이 뻥뻥 뚫려있는 현재의 대한민국. 불법 촬영, 싱크홀, 청년실업, 재개발, 데이트 폭력 등등. 붕 떠 있다가도 찰싹 달라붙는 소재의 무게로 인해 마냥 웃을 수 없어요. 현실이 지독히도 말이 안 되는 것투성이여서 영화의 아이러니는 효과적이기도 하고요.


믿음


결국 인간은 믿으며 살아가야 해요. 자연의 법칙, 순리, 인과를 모두 짓밟고 서 있는 존재들이니, 탄생의 배덕함을 믿음으로 극복하며 나아가는 거죠.


영화는 윤영을 중심으로 윤영을 둘러싼 세계를 보여주고 있지만, 주인공을 콕 집어 ‘온리 원’ 윤영이라고 하기엔 뭔가 아쉬워요. 지연씨와 메기를 이야기하고 싶네요. <메기>가 시작할 때 우리가 가장 처음 만나는 건 다름 아닌 메기예요. 메기는 영화의 길잡이죠. 천우희 배우의 다정한 목소리가 찰떡입니다. 그 목소리를 듣다 보면 메기가 하는 말을 모두 믿고 싶거든요. 메기는 영화 초반 슬쩍 힌트를 줘요. 이 영화는 진실을 추적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요.



지연씨가 실제 스크린에 나오는 분량은 매우 적지만 우리는 영화 내내 지연씨의 존재를 느껴요. 윤영과 성원 두 사람이 밤을 깎아 먹을 때 성원은 윤영에게 향수를 뿌렸냐고 하고, 윤영은 성원에게 익숙한 향이냐고 묻습니다. 또 성원의 허벅지에는 “ㅈㅣㅇㅕㄴ”을 덧칠한 MOM이 새겨져 있어요. 성원에게 새겨진 지연의 흔적, 그와의 꿈 같은 만남은 윤영의 세계를 뒤흔듭니다. 병원 부원장인 경진에게 믿음 교육을 이끌 정도로 굳건해 보이던 윤영은 혼란스러워요.


결국 빠지는 건 성원이지만 구덩이에 빠졌던 건 윤영씨였을지도 몰라요. 경진의 나레이션과 메기의 몸짓, 지연씨를 믿는 선택. 모두가 구덩이 속 윤영씨에게 손을 건넸어요. 윤영씨의 어떤 믿음이 무너질 때, 어떤 선택은 믿음으로써 윤영씨를 빠져나오게 했어요.


선택


<메기>는 행위를 조명하는 영화예요. 믿음과 의심을 얄팍한 종이 한 장, 양면에 적어 놓고 이리저리 뒤집어봐요. 인물들은 어떤 게 진실이고 거짓인지보다는 무엇을 믿을지, 무엇을 의심할지 선택해요. 믿을 걸 선택하고, 선택함을 믿는 것. 메기 세계 안에서 인생은 인과관계보단 선택의 연속들에 가까워요. 그런데 선택은 무책임하고, 가이드 따윈 없으며 더럽고 치사해요.


진실과 믿음은 한 쌍 같아 보이지만요. <메기>는 믿음 옆에 진실이 아닌 선택을 배치해요.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요. 동시에 진실이 중요하지 않게 된 현실을 꼬집어요.


왜 우리는 진실을 믿을 수 없게 된 걸까요. 왜 우리가 믿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 있는 걸까요. 이걸 깊게 파는 대신 구덩이를 빠져나오기 위한 사람들을 담아요. 그래서 “왜?”가 되게 중요해 보이면서도 영화는 그것보다는 다른 거에 관심이 많죠.


구덩이를 메우는 일은 사실 깨진 유리 조각을 붙이는 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격. 싱크홀이 생겨 난 자리는 이제 더 예전의 땅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그리고 우리는 싱크홀이 생겨나는 걸 막을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영화는 이를 비관하지 않아요. 구덩이에 빠지는 일이 불가피할 때에, ‘왜 구덩이에 빠졌는지, 우리는 누구고, 혹시 우리를 빠뜨린 사람이 있는지, 구덩이 밖에는 뭐가 있는지’ 생각할 시간에 일단은 빠져나오자는 거예요.



엑스레이에 찍혔을까 봐 사람들은 움직여요. 싱크홀에 빠질까 봐 실업상태인 청년들이 움직이죠. 재개발로 집을 잃은 사람들이 움직여요. 누가 찍었는지, 왜 싱크홀이 생겼는지, ‘재개발 100% 동의’는 누구에 의한 건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 걸까요, 그래서 보여주지 않은 걸까요? 보여주지 않는 건 중요하지 않다는 걸까요? 이들의 허우적거림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어요. “그건 너네 꺼가 아니야” 메기의 간절한 외침이 두 사람에게는 닿지 않지만,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에게는 닿잖아요.


결국 선택마저 오로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특히나 권력은 아래에서 음습하게 작동하죠. <메기>는 선택뿐이란 걸 알려주는 동시에 선택 역시 ‘선택된’ 선택이라는 것을 내포해요. 그렇지만 영화는 선택하는 주체인 권력들에게 서사를 주지 않아요. 우리가 영화를 볼 때 만나며 이야기해 볼 상대는 찍힌 사람들, 메우는 사람들, 떠나는 사람들, 당하는 사람들.


재밌는 지점은 선택 후의 감정에는 어물쩍 넘어가는 거예요. 거창했던 믿음 교육이 ‘사과와 사슴’사건으로 실패했고 엑스레이는 그대로 증발했어요. 반지를 찾던 성원은 윤영에게 미안해서 어떡하냐고 했지만 정작 윤영은 반지 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죠. 윤영은 ‘어떻게 어떻게’ 집을 구했고 싱크홀에 냅다 흙만 들이붓는다고 해결되는 건지는 아무도 물어보지 않아요.



사소한 선택이 낳은 엄청난 후폭풍. 재난 영화의 클리셰인 나비효과와 반대로 <메기>는 결과보다는 ‘선택함’에 집중해요. 그래서 오히려 마지막 구덩이가 내려앉는 순간이 부각되고 의도가 담겨요. 생각하지 않기로 생각하던 윤영이 의심하고 믿어서 내린 선택을 응원하기로. 싱크홀이 지각변동이라면 마지막 싱크홀은 윤영 마음의 지각변동 결과예요.


윤영을 구덩이에 빠뜨린 성원이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조바심이 나요. “윤영아, 얼른 도망쳐!”


윤영은 아마 그 뒤에도 많은 구덩이를 만나고 마음속에 싱크홀들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가 구덩이를 얼른 빠져나오길 바라는 걸 선택해보는 거죠. 그렇게 우리의 믿음을 받은 윤영이 잘 살기를 바라는 거죠.



세탁소 아저씨는 그 짧은 순간에도 요구르트를 줄지, 윌을 줄지 고민해요. 병원 사람들은 다 같이아팠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출근하고 메기아빠는 지진이 안 날까 봐 걱정해요. 성원의 의심이 활활 타는 동안 2층에서 책을 읽던 던밀스는 말하죠. “왠지 더 읽어야 할 것 같아.”




<메기>는 결국 사람에 관한 영화일지도 몰라요.



믿음, 선택, 의심, 진실. 이 거대한 가치들 사이사이를 마구잡이로 오가는 사람들. 펼쳐놓은 진실에 의심을 덧대어 믿음을 재단하는 사람들. 무엇이 정답인지는 아마 죽을 때까지 모르겠지만 아무렴 ‘전진, 전진!’하는 사람들.




(+)

재밌는 장면은 볼수록 더 많아져요. 처음엔 성원과 화분, 다음엔 고릴라와 경진, 이번엔 대기실에서 목걸이를 꺼내든 경진을 얼른 말리는 윤영이. 좋아하는 장면은 윤영이 속삭이는 “메기야”, “맥신”이 흘러나오는 모든 장면.

(+)

성원은 구덩이를 메우는 일을 해요. 그리고 부풀려진 의심에 터진 적이 있죠. 그래서 의심이 부풀었을 때 바늘로 아프지 않게 터졌으면 좋겠다고 말해요. 성원은 비면 채우고 부풀면 터뜨리는 사람.

(+)

적재적소라는 말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이옥섭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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