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희야>
쏟아지는 억수에도 다만 살아가기를
영화, <도희야>
한 개인이 타인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어디서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부자들이 친절한 이유는 그들이 부자이기 때문이라고. 풍요는 마음의 여유 공간을 만든다. 뒤집어 말하자면,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필히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그만큼 타인에게 내어줄 공간이 부족하다.
영남은 그런 의미에서 꽉 차 있는 상태이다. 내가 나인 탓에 쫓겨난 이 사람은 마음의 여유는커녕 자신을 지탱하기에도 버겁다. 모두가 자신을 밀어내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영남은 비틀리고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꽉꽉 찼기에 되려 겉은 텅 비고 무기력하다. 영남이라는 인물을 구성하는 중요한 설정 중 하나는 그가 알코올 홀릭이라는 것이다. 시골까지 생수병을 들고 올 정도로 서울깍쟁이처럼 보이던 영남이 생수병에 소주를 콸콸 붓는다. 그럴 때 그 행동의 익숙함과 타성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살아가기 위해’ 감내해왔는지 보여준다.
직업상 경찰일 때를 제외하고선, 영남은 무기력한 태도로 일관한다. 영화의 눈여겨 볼 지점은 이런 영남이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정의롭게 성장하거나 극적으로 일을 타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남은 끝끝내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못하기보단 해결하기를 포기한다. 성 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받는 억압에 맞서지 않았고, 불법체류자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도 못했다. 오해는 도희로 인해 밝혀져 풀려났지만, 다시 불합리한 이유로 쫓겨났다. 아마 도희의 손으로 가족들을 처치했을 걸 알면서도 영남은 도희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
영남은 구세주가 아니다. 그 또한 겨우 살아가는 인간일 뿐이다. 자신의 내면 안으로 아무도 들일 수 없을 것 같고 스스로마저 내면 안에 들일까 싶은 사람. 하지만 그렇기에 영남만이 이주 노동자와 도희의 눈을 맞출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도희야>가 영남과 도희 두 사람이 만나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그 만남을 통해 변하는 인물은 두드러지게 도희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영남이 도희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을 마주하는 영화로도 볼 수 있다.
영화의 공간은 도희가 사는 작은 어촌 마을로 한정된다. 공간을 중심으로 봤을 때 영남은 경계에선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영남은 경계에 서 공간을 넘나든다. 보통 공간을 넘나드는 행동은 주체적이고 유연하게 보이지만 <도희야>에서는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는 도로와 자동차가 많이 나온다. 도로는 공간과 공간을 이어주지만 반대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 위에 선 영남 또한 마찬가지다. 영남의 ‘넘나듦’은 총 2번으로 볼 수 있다. 영화가 시작할 때 어촌 마을로 쫓겨나고, 영화가 끝날 때는 그곳에서 다시 어디론가 쫓겨난다. 2번의 넘나들기는 영남의 자의가 아니다. 그는 끝끝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의 시작과 끝이 대구를 이루는 장면이 주는 인상은 확연히 달라진다. 영남은 그사이에 도희를 만났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가장 쉽게 다가오면서 마지막까지 영영 멀어지는 인물은 도희이다. 폭력이 익숙해진 삶을 사는 도희를 보고 있으면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이 들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도희는 계속 예상 밖으로 튀어 나간다.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히스테리를 부리며 자해를 하고 영남에게 과도하게 집착한다. 이내 용하를 바라보는 그의 지쳐버린 눈동자가 섬뜩해진다. 관객은 도희의 결정적인 선택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용하에게 얼핏 스쳤던 황당함과 두려움은 관객의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도희의 선택이 서글프다. “따라 하는 걸 잘하는” 아이는 최대로 발휘한 반격조차 자기파괴적이다. 그 책임은 오로지 가해자 한 명의 몫일까.
캐릭터에 부여되는 전형성을 지우는 선택은 관객의 만족에 기여하기보다는 관객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인물이 그렇지 않았을 때, 우리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연약하고 순수하지 않은 피해자인 도희를 보며 우리는 ‘피해자는 연약하고 순수해야 피해자가 되는(인정받는)’ 단단한 관념을 맞닥뜨려야 한다. 그 관념 자체가 폭력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을 함께 사는 여러 명의 영남들과 도희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위태로이 달려갈 때, 끝내 “도희야”라고 이름 부르지 못했던 망설임을, 그 부채감을 고민하고 가져가야 한다.
도희는 ‘어린 괴물’이며 영남은 도희를 견뎌내기엔 위태로운 사람이다. 두 사람의 미래는 께름칙하고 추적인다. 그렇기 때문에 영남이 도희에게 내민 마지막 손길을 더 오래 기억하게 된다. 영남의 행위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이 아니다. 단호하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영남이 복잡한 얼굴로 다시 도희에게 향한다. 수많은 불안과 장담할 수 없는 미래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내 영남은 도희에게 간다. 전 애인의 말마따나 ‘중요한 순간에는 늘 피하기만 했던’ 영남이 자신의 마음을 모두 마주하며 간다.
이 아이는커녕 나 자신도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확신도 없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선택을 해본다는 것. 타인의 삶을 나의 삶과 기꺼이 함께해보겠다는 것.
떠나는 두 명에게 쏟아지는 억수 같은 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멀어져 가는 그들의 삶을 지켜본다. 말라비틀어졌던 꽉 찬 마음에 비가 내려 다만 촉촉해지기를. 다만 살아가기를.
(+)
최근 제일 사랑하는 영화인 <벌새>와 좋아하는 영화인 <영주>가 많이 떠올랐다. 단순히 여성 청소년이 주인공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삶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닐 때에도 그 삶을 지속해나가는 태도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럼에도 세상은 참 신비하고 아름답다”라는 말이 그네들에게도 전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인물들을 딱하고 안쓰럽고 불쌍하게 보지 않는다. 그런 마음을 경계하고 질문한다. ‘공감’으로 쉽게 이름 붙이지 않는다. 나는 이 태도를 유지하고 싶다. 되도록이면 그런 가림막 없이 영화의 세계와 인물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