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영주>
차라리 화를 냈으면 좋겠다. 나를 저주하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며 윽박을 질렀으면 좋겠다. 그러나 내 앞의 당신은 화를 내긴커녕 나를 위로한다.
그러면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구 흔들린다.
복수를 이겨버린 외로움, 영화 <영주>다.
영주는 바쁘다. 세상은 가장이 된 영주에게 아이이면서 어른이기를 요구한다. 영화 속 영주와 처음 관계를 맺는 어른은 고모이다. 고모는 집을 팔라고 이야기하며 ‘이런 일은 어른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다 영주의 동생, 영인이 사고를 치면 고모는 영주를 나무란다. “영인이는 그렇다 쳐도, 영주 너는 어른답게 굴어야지.” 그렇다면 영주는 이렇게 대답한다. 자기는 어린애가 아니어서 엄마 같은 거 필요 없다고.
<영주>는 간단히 말하자면 주인공 영주가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이다. 그냥 어른이 아닌, ‘엄마 같은 거 필요 없는’ 어른 말이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철부지 동생 영인이가 피시방을 털다 잡혔단다. 합의금은 빨리 낼수록 좋다는데, 영주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일용직이다. 어른들은 그런 영주네 사정이 궁금하지 않다. 앵무새처럼 필요한 서류만 이야기한다. 결국 영주가 찾아가는 건 고모지만, 고모는 더 이상 영주를 신경 써주지 않는다. 그때 영주의 발치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누가 봐도 수상한 신용대출 광고다.
영화는 영주를 저 구석으로 계속 몰아넣는다. 상문을 만나기 위해서겠지만, 나는 상문 가족을 만나기 전까지의 내용이 마음 아팠다. 비단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닌 서늘한 현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한 사회에서 응당 책임져야 할 것들을 개인에게 떠넘겨버리는 구조는 너무도 쉽게 한 사람을 지워버리기도, 괴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현실은 학교 밖 청소년, 특히 미성년 여성을 간단히 사회의 외부에 위치시켜 지워버린다. 지금도 살아가고 있을 수많은 ‘영주들’이 있음에도 맨 처음 <영주>의 줄거리만 보고 ‘말도 안 되는 일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나를 반성한다. 기억하려 할수록 잊고 살았던 경계와 외부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갈 곳이 없는 영주는 알고 있는 마지막 어른, 부모를 죽인 상문을 찾아간다. 뜬금없이 두부 가게에서 일하게 된 영주에게 상문의 아내, 향숙은 너무도 친절하다. 이 낯설고도 껄끄러운 친절은 영주를 진동시킨다. 진동하는 영주는 어떤 일방적인 태도를 가지지 못한다. 무엇들이 자꾸자꾸 마음에 걸려 향숙이 챙겨준 두부를 버리고 상문의 가게에서 도둑질을 하다가도 쓰러진 상문을 그냥 내버려두지 못한다.
향숙과의 관계에서 영주는 향숙에게서 다시 엄마의 존재를 찾아가는 듯하다. 처음 향숙의 집에 방문한 영주에게 향숙은 뜻밖의 반응을 보인다. 너는 좋은 아이라고, 너한테 고맙다고 속삭여주는 향숙의 진심에 영주는 자꾸만 기대고 싶어 진다. 향숙은 두부 가게에서 같이 만두를 만드는 영주를 ‘막내딸’이라고 이야기하고 영주는 자신이 그린 것을 가게에 붙인다.
그렇지만 영주의 ‘딸 되기’를 방해하는 두 가지가 있다. 승일과 영인의 존재이다. 향숙의 집에서 마냥 좋다가도 아들인 승일의 칫솔을 보고, 잠든 승일을 지켜본다. 원래 자신의 집으로 가는 영주의 발걸음은 그다지 상쾌하지 않다. 향숙이 준 스카프를 매고, 잠바를 입은 영주는 향숙과 모녀라고 할 정도로 사이가 좁혀지지만 그 순간 영인에게서 전화가 온다.
영인-집-죽은 부모님에 영주는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지금 영주에게 중요한 것은 부모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부모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맺는 새로운 관계들이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영인은 비난하지만 영주는 대답한다. “내가 왜 미안해야 돼? 미안해야 할 사람은 엄마아빠 아니야? 그냥 그렇게 죽어버리면 다야?” 영주의 말에도 영인이 다시 한번 그를 가혹하게 몰아붙인 것은 영주 스스로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영주는 한 번만 더 향숙과 상문에게서 인정(위로) 받으면 이 모든 죄책감에서 벗어난 채 그들에게 의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믿음일까, 불안감일까, 미안함일까. 영주가 그렇게 밤을 거슬러 달렸던 이유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영주에게 부부는 처음으로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다. 사소한 실수에도 괜찮다며 영주를 위로해줬었는데 말이다. ‘영인이 니가 틀렸어.’ 끝내 보내지 못하는 문자 메시지. 상처에 익숙한 사람은 상처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곤 한다. 잠들지 못하는 영주는 또다시 승일을 찾아간다. 승일의 방에서 모든 인물이 모인다. 침대 맡에 등이 켜지고 향숙은 한참을 머무르다 영주를 위해 기도한다. 사죄이며, 사과이며, 원망이다. 그 방안의 모든 인물들이 가지는 감정일 것이다. 부부가 방을 나가고 승일의 숨소리만 들리면 영주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향숙이 매어줬던 머리끈을 다시 승일에게 돌려준다.
<영주>는 깊고 작은 영화이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가 그렇다. 카메라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영주를 바라본다. 그러나 잔잔한 영화는 또 아닌 것이 <영주>의 마지막을 보고 있노라면 심장 덜컹이게 몰려오는 감정들에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푸르고 깊던 새벽은 침대에 놓인 등이 아닌, 어렴풋이 떠오르는 해를 만나며 아침이 된다. 엄마의 가디건도, 향숙 아줌마의 분홍 잠바도 걸치지 않은 영주는 엄마를 애타게 부르다가도 두 발을 내딛는다.
외로움은 가엾고 관계는 절실하다. 진동했던 영주는 편하게 기댈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가지만 결국 실패한다. 그러나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영주는 자신이 고모에게 말했던 ‘엄마는 필요 없는 어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영주의 마지막 뒷모습에 나는 앞서 간단히 <영주>를 소개했던 말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의 결말로 인해 영주가 ‘어른이 되었다’는 훈장으로 간단히 남기고 싶지 않다. 영주는 그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영주의 어떤 실패들이 반드시 성공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은 너무 잔인한 말일 것이다. 그러니 그저 영주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른이나 아이가 아닌 그저 영주로서 말이다. 그리고 영주에게 하고 싶은 말은 살아가는 사람이 그렇듯, 겨울 끝엔 봄이 있다는 것이다. ‘절망 끝에 만난 낯선 희망’이 그 누구에게도 아닌 영주의 안에 있기를, 그리하여 행복하기를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