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여성의 날은 1908년 열악한 작업장에서 화재로 불타 숨진 여성들을 기리며 미국 노동자들이 궐기한 날을 기념하는 날로, 1975년부터 매년 3월 8일 UN에 의하여 공식 지정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오늘을 맞아 내가 관람했던 여성 영화 몇 편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드라마 / 영국 /106분
감독 : 사라 가브론
캐리 멀리건, 메릴 스트립, 로몰라 가레이, 헬레나 본햄 카터
서프러제트는 20세기 초 영국에서 참정권 운동을 벌인 여성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서프러제트의 얼굴이라면 WSPU를 설립한 에밀리 팽크 허스트를 생각하기 마련인데 영화는 그보다는 서프러제트를 구성했던 수많은, 얼굴을 가진, 여성들에 주목한다. 흔히 '부르주아 여성들의 배부른 푸념'이라고 평가받았던 서프러제트.
하지만 영화는 노동자 계급인 주인공 모드 와츠(캐리 멀리건)를 내세워 서프러제트가 왜 서프러제트가 되었어야만 했는지, 왜 모든 걸 다 잃고도 모든 걸 다 걸 수밖에 없었는지를 따라간다.
와장창 깨지는 유리창에 새겨진 ‘Vote for Women!'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권리를 얻기 위해 흘려야 했던 피는 비단 신체로부터가 아니었다.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은 일터와 가정에서 즉각적으로 억압받았다. 가정의 책임('아내를 잘 관리하지 못한 남편')으로 돌려 정치 운동으로서 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 참정권 운동.
영화 <서프러제트>의 한계는 있지만 그럼에도 '돌을 던져 창을 깨는' 메시지는 유효하다. 20세기 초 영국 서프러제트가 옛날 옛적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토록 공감되고 무겁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일까.
드라마 / 미국 / 114분
감독 : 스티븐 달드리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
그렇다면 정치적 권리를 획득한 뒤 여성들의 삶은 남성과 동등해졌을까. 영화 <디 아워스>는 약 80년의 세월을 넘나듦과 동시에 단 하루, 세 명의 삶으로 대답한다.
1920년대 <델러웨이 부인>을 쓰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1950년대 <델러웨이 부인>을읽는 로라(줄리안 무어), 2000년대 '델러웨이 부인' 클래리사(메릴 스트립). 영화는 자칫 난잡할 수도 있는 스토리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로 엮어낸다.
사랑하는 남편이 있고, 사랑하는 아이가 있고, 행복한 가정에서 편하게 살아가면 된다. 그런데 혼자만이 겪는 고통은, 가부장의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름 할 수 없는 병'은 깊어지고 일상은 죽음과도 같다. 죽음을 생각하다 이내 집으로 돌아와 남편을 위해 케이크를 만드는 로라를 보라. 그가 여는 남편의 생일파티, 'Happy Birthday'에 묻어있는 지독한 고통.
타임 내내 축축하고 우울하여 감정적 소모가 크다. 그러나 세 여자를 관통하는, 영화를 감상한 우리의 마음에 턱 하니 자리 잡는 그 무엇은 단지 우울함은 아닐 것이다.
액션, 코미디 / 미국 / 116분
감독 : 폴 페이그
멜리사 맥카시, 크리스틴 위그, 케이트 맥키넌, 레슬리 존스
이 영화를 어릴 적 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대중문화가 재현하는 여성 캐릭터는 이분법에 갇혀있었다. 과거 재현물에서는 더 심각했고 사람들은 그러한 재현 물들을 접하면서 현실과 소통했다. 여성은 그렇게 '인간'이 아닌 여성으로 남았다. 대중문화에서든, 현실에서든.
대중문화를 접하는 연령대가 점차 낮아지고 있고 아직도 문제가 남아있는 지금,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의 흐름에서 페미니즘은 지금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를 놓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었고 서사, 캐릭터 재현과 산업 전반에서 변화하는 지점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에 따라 과거와는 다른 여성 캐릭터와 서사를 만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과거 시리즈의 유쾌한 리부트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이다.
기존 서사를 따라가면서도 페미니즘적인 시선이 영화를 재구성한다. 여 / 남의 기존 캐릭터 위치가 완전히 바뀐 <고스트 버스터즈>를 보고 있노라면 '맘 편하게 B급 코미디를 볼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해하는 나 자신에 씁쓸한 기분을 느낀다. 성차별 문제와 관련해 맘 편하게 대중문화를 접하고 싶은 나의 바람은 개인적이기보다는 대중문화를 제작하고, 소비하는 사람들 모두를 향한다. 행동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고 지적을 피해 갈 순 없을 것이다.
*비슷한 영화로는 <오션스 8>, <레이디스 나잇>이 있고 폴 페이그의 다른 여성 영화로 <부탁 하나만 들어줘>가 있다.
다큐멘터리 / 한국 / 84분
감독 : 김보람
여경주, 김보람
연대 1 年代
-지나간 시간을 일정한 햇수로 나눈 것.
연대 2 連帶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짐.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
<피의 연대기>는 두 가지 의미의 연대가 담긴 영화이다. 연대기로서의 피, 피로서의 연대. 영화의 설명처럼 '범시대적'이고 '범세계적'이다. 세계가 시작할 때부터 겪어온 문제들이자 여성 삶의 주기 전반에 연관된 문제인 월경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간 금기시되어 왔던 여성의 몸, 월경. 자신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모르길 강요받았던 사회적 분위기가 낳은 결과는 무엇인가. 생리대 사태에서 알 수 있듯 월경은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국가적 정치적 차원에서 논의해야 할 주제이다.
<피의 연대기>로 느낄 수 있는 그 첫 단계는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공감과 연대의 순간들이다. 구체적으로 명명하지 않아도 경험을 통해 공감하는 그 어떤 순간들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느꼈을 수도, 누군가는 마지막에 가서야 느꼈을 수도 누군가는 느끼진 못해도 (영화를 끝까지 봤다면) 들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영화를 통해서든, 삶을 통해서든 '수많은 월경들'을 생각했다는 것, 경험했다는 것. 시공간을 넘어 수많은 여성들의 월경이 더 이상 개인의 문제로 남아있지 않기를 바란다.
미스터리 / 한국 / 100분
감독 : 이언희
엄지원, 공효진
한국의 '워킹맘'은 무엇일까. 슈퍼우먼? 가정에 소홀한 매정한 여자? 그렇게 생각한다면 (설마 있을까 싶지만) <미씽>을 당장 확인하시길.
지선(엄지원)의 삶은 슈퍼우먼도, 그렇다고 완전한 어머니도 아닌 한국 여성의 삶이다. 노동과 육아 사이에서 고통받는 지선에게 나타난 보모 한매(공효진). 지선은 안심하던 와중 보모 한매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진실을 향하는 지선은 직장에서, 가정에서 되려 능력과 자질을 비난받는다. "엄마라면 일도 잘하고 아이도 잘 키워야지"
정말일까? 정말 엄마라면 일도 잘하고 아이도 잘 키워야 할까? 영화는 지선을 '엄마로서의 자질'을 시험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에 시선을 확장한다. 여성이 일과 가정에서 양립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사회 구조와 현실을 말이다. <미씽>은 진실을 찾아가는 영화이다. 지선이 한매를 찾듯 여성 개인에서 사회 구조 문제를 찾아간다.
<미씽>을 추천하고 싶은 또 다른 이유는 현실에 존재하지만 지워진 여성의 삶들-한매의 삶으로 비롯된-을 꺼내 보인다는 점이다.
<미씽>이 인상 깊었다면 '모성'의 신화성에 의문을 던지는 영화 <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도 추천한다.
이밖에도
가부장제의 외부에 존재하는 대안적 사회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 <안토니아스 라인> (Antonia's Line, 1995)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영화 <레이디 맥베스> (Lady Macbeth, 2016), 아이 엠 러브 (I Am Love, 2009)
가부장제의 성별적 계급적 억압에 맞섰던 <리지>(Lizzie, 2018) 등이 있다.
마무리하며
이 날을 맞아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했고 역시 영화와 글이었다. 쓰면서 내가 감상한 여성 영화가 이렇게 적었나 반성을 했다.(특히 관람한 여성 영화가 인종 다양성을 고려하지 못해서 반성을 많이 했다.) 탈탈 털었으니(?) 내년 여성의 날 글에는 새로운 영화들로 채울 수 있도록 올해도 노력해서 감상해야겠다.
(모든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다른 추천하고 싶은 여성 영화가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