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의 선택이 많아지길 바라며
도시의 불빛들이 남기는 잔상을 좋아한다. 형형색색의 빛 번짐은 도시 안의 피로감이 일렁이다 넘친 것 같은 모양이기도 하고, 보고 있노라면 도시가 가진 번잡스러움과 적막함의 경계가 흐려지는 느낌도 좋다.
나의 단상들도 잔상을 남긴다. 쓸 수밖에 없는 마음이 넘친 탓에 흐릿하지만 *'지워지지 아니하는 지난날의 모습'임은 분명하다. 나에게 떠오르는 많은 단상이 어떤 색의 잔상이 될지 궁금하다.
부지런한 사람이라곤 할 수 없지만 멈추진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다 보면 달라진 것 없는 일상 속에서도 어떤 '때'를 마주하게 된다. 글을 남겨야 할 때. 다시 또 언제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서둘러 노트북을 켠다.
백신 휴가로 어쩌다 보니 3일을 내리 집에서 쉬게 되었다. 가이드에 따라 하루 이틀은 극심한 안정을 취해야 했다. 매일이 정신없던 차에 맞이한 휴가라서 그런지 집에 누워만 있어야 한다는 제약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집에서 혼자 노는 걸 누구보다 좋아하지만 억지로 하려고 하니 갑자기 날씨는 왜 이렇게 좋은 건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러닝을 하고 싶었다. 평소의 주말이었다면 SNS를 돌며 의미 없고 소모적인 텍스트 속에 파묻혔을 테다. 그런데 이틀 내내 나는 보고 싶던 영화와 드라마를 봤다. 어떻게 보면 뻔하지만 뜻밖에도 내 오랜 고민이 해소되었던 휴가였다.
일을 시작하고 그렇게 좋아하던 영화를 볼 절대적인 시간이 줄었다. 그러면서 생긴 나쁜 습관이 있는데, 바로 영화에서 가성비를 따지는 마음이다. 평균 2시간이라는 영화의 시간적 특성이 여가시간이 짧아진 나에게 큰 허들이 되었다. 처음엔 평점이 높거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혹은 추천한 영화만 골라봤다. 새로운 영화를 보기보다는 봤던 영화를 또 보기도 했다. 그러다 짧은 러닝타임의 영화만 골라보게 되고, 결국엔 유튜브를 찾게 되었다. 오래 지속되다 보니 영화에 대한 관심도 사그라들었다.
이런 흐름이 영화에만 국한되진 않았다. 급하게 찾아온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기 바빴던 탓에 취향은 쉽게 굳어졌다. 새로운 취향을 '미'선택함은 두려움이다. 내적 경계는 깊어지고 모험을 주저하게 된다.
그렇게 익숙하고 잘 알려진 콘텐츠만 골라볼 때마다 시간도 잘 가고 마음도 편하고 재미도 있었다. 그런데 자꾸만 떠오르는 문장을 지우기는 어려웠다. 언젠가 김혜리 기자님의 '당신의 우주는 그렇게 좁아진다.'라는 말.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나는 콘텐츠를 선택할 때 그 문장을 떠올렸다. 그리곤 지웠다. 일과 환경에 익숙해지기도 바쁜데 쉬는 시간까지 신경을 써야 해?라고 생각하며.
일상이 갑자기 멈췄던 이번 주. 넘쳐나는 시간을 감당하지 못한 나는 평소의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고 아주 단순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깐깐하게 따지고 고르는 게 아니라 '그냥' 틀었다. 이틀 동안 여러 편 영화와 드라마를 봤다. 아주 예전에 보고 싶었던 것도 있고, 요즘 유행하는 것도 있고, OTT를 넘기다 클릭한 것도 있다. 재밌기도 그럭저럭 괜찮기도 했다. 아무렴 좋았다. 가성비 없이 의외성으로 가득 찬 이틀이었다.
내 시간을 투자한 만큼 값어치 있는 영화여야 해.
앞으로도 이런 생각을 경계할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영화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고, 아니고 싶다.
물론 시간과 마음이 충분히 여유로워야 가능하단 걸 안다. 무엇이든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은 한계가 있으니까. 그렇지만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느낀다. 삶에서 뜬금없지만 문득 얻게 되는 감정이 있다고. 그것이 나의 용기가 되었다면 나의 우주는 조금 커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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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하반기엔 백신 휴가라는 것도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