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이, 후다닥 밥 해 먹다
더위가 물러갔다.
참으로 지독하고 끈질겼던 2024년의 여름은,
시간의 흐름에 쫓기면서도 한참을 미적거리다 10월이 훌쩍 지나서야 계절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날이 선선해지면서 더위로 무기력했던 은이는 입맛을 되찾았다.
밥에 대한 의욕이 불타올라 하루 세 번,
고급 레스토랑의 수석 요리사라도 되는 양 진지하게 밥상을 차려내고
앞치마를 풀고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밥상에 앉은 은이는 주인공이 되었다.
밥을 먹는 그 소중한 시간,
꼭꼭 음식을 씹으면서 맛을 음미하고,
느긋하게 차와 후식을 즐기면서 밥의 여운을 누렸다.
혼자 산 지 1년이 되어가면서 은이는 살림이 훨씬 수월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가족의 밥상을 책임지는 연륜 있는 주부에게는 어림도 없습니다만,
혼자라는 지금의 입장에 최적화된 솜씨로 제법 능숙하게 살림을 꾸려갔다.
하지만,
하루 세끼 밥상을 준비하고, 먹고, 치우는 데는 수고와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
달랑 혼자 먹는 밥상인데 말입니다.
세끼 밥에 쏟아붓는 노고와 관심과 시간이 일상의 반은 되는 기분인데.
하루 일과가 꽉 짜여 매사에 종종걸음일 수밖에 없는 다른 이들과 달리,
하루, 한 달, 네 계절.
마음대로 시간을 쓸 수 있는 처지여서 바쁠 것 없는 은이는,
유튜브를 보면서 천천히 밥을 먹고,
차를 홀짝이면서는 친구들과 톡을 나누고,
음악이 흐르는 방에서 창으로 들어오는 환한 햇살을 받으며 사과를 먹고 아이스크림을 또 먹었다.
한없이 평화롭게,
그렇다.
은이는 음식의 맛은 물론 밥 먹는 시간, 그 자체를 즐겼다,
밥을 먹는다 함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고 활동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를 얻는 신체적인 과정인 동시에.
미각과 후각, 시각과 위장의 포만감으로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정서적인 행위이고.
정신과 육체의 휴식이며,
재충전의 시간이다.
밥상을 함께 하는 식구 사이에서는 교감과 연대가 이루어지지.
은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매일, 함께 한 밥상에 올라온 정성이 듬뿍 담긴 맛있는 음식들을 사랑했는데.
그에 못지않게 가족이 밥상에서 두런두런 나누었던 일상의 이야기와,
음식 맛에 공감하고 서로에게 음식을 권하면서 전해지던 사랑과 보살핌의 마음을 지극히 애정했으니.
혼자 먹는 밥이어도 어느 한 끼 대충 해결하지 않고 마음과 손길이 듬뿍 든 밥상을 챙기고 즐기는 거였다.
다소 서툴더라도 갓 만들어낸 음식은 무조건 맛있고,
순수한 집밥에 길들여지면 어지간한 바깥 음식은 성에 차지 않으며.
건강한 식재료로 솜씨를 다해 만들어 내는 좋은 음식의 힘을 믿는 은이는,
음식과 밥상에 대한 유별난 애정을 조금이라도 포기할 수 없었으니.
밥을 준비하고,
밥을 먹고,
자리를 치우는 모든 과정에 지극한 마음을 쏟았다.
하지만 이제,
대상을 그려내고 싶은 예술적인 열정이 끓어오르고,
손에 잡히는 대로 책 읽는 재미에 흠뻑 빠져서
평생 그림 그리고 책 읽으면서 살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어, 하는 열망이 더해가는 나날에,
이렇듯 매일매일 먹는 데 들이는 공이 너무 지나쳐서
내 청춘 밥해 먹다 다 가버리겠네, 하는 한탄이 나올 참이라.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의 배분이라는 기로에서,
밥상과 작업에 균형을 찾아야 했으니.
결단을 내려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밥과 밥 먹는 행위의 가치는 지키면서 동시에
밥에 대한 과다한 시간과 노고라는 부담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
어찌해야 할까?
◇ 후다닥- 빨리, 간단하게,
그러면서도 맛있고 건강한 밥을 먹기 위한 은이의 식재료들
기본이 되는 양념을 먼저 갖춰야 한다.
소금, 설탕, 여러 가지 기름들과 간장, 고춧가루, 후춧가루, 참깨에,
된장, 고추장은 빠질 수 없고.
국물을 내거나 고기를 삶을 때 다시마, 월계수 잎, 통후추가 있으면 좋지.
생강가루도 요긴하고.
대파, 마늘, 고추, 양파는 반드시 갖춰야 한다.
대파나 고추는 쓰고 남은 것을 잘게 잘라 냉동실에 보관한다.
다진 마늘과 잘게 썬 대파는 밀폐용기보다 비닐봉지에 넣어 납작하게 펴서 얼리면,
냉동 상태로 비닐 바깥에서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 필요한 만큼 덜어낼 수 있다.
양념장도 만들어 두면 요리하기가 훨씬 쉬워지는데,
간장, 설탕, 다진 마늘, 술- 즉 짠맛과 단맛에 다진 마늘과 술을 더한 기본적인 불고기 양념과,
여기에 고추장, 고춧가루를 더한 매운 양념까지 만들어 두면,
요리할 때 대파, 참기름에 고추 정도를 더하면 볶음이나 조림 같은 여러 가지 반찬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들깻가루, 흑임자가루, 감자전분, 찹쌀가루에 밀가루도 구비하고요.
천연 재료로 만든 각종 육수 류도 요긴하다.
농축액, 분말, 액체, 코인 등 다양한 형태로 동식물 여러 재료를 쓴 육수 종류가 시중에 나와있는데,
본인 입맛에 맞는 두어 가지 갖춰두면 갖가지 국물 요리를 쉽게 만들 수 있다.
식재료로는 자취생 필수품인 김, 김가루, 계란에, 미역, 햄 종류, 각종 통조림들.
쌀, 국수, 누룽지, 떡국떡, 김치, 그리고 여러 고기 종류, 시래기 같은 냉동채소와 버섯,
생선, 만두 같은 냉동식품,
입맛에 따라 미역이나 마른 나물,
멸치, 황태채, 건새우 같이 밑반찬을 만들 수 있는 식재료들이 있으면 언제든 반찬 만들기가 용이하다.
당근과 양배추, 감자, 고구마도 비교적 저장성이 좋으면서 요리에 유용한 채소.
샐러드로, 쌈으로, 날로 먹어도, 쪄먹거나 볶음에 넣어도 조화로운 팔방미인 재료이니 갖춰두면 좋다.
장을 봐오면 그대로 던져두지 말고 일부라도 용도 별로 씻어서 손질해 두어요.
이렇듯 손질된 식재료가 항상 준비되어 있으면,
귀찮은데 사 먹을까?, 싶다가도,
아니야, 금세 밥할 수 있어, 하면서 앞치마를 두르게 된다.
기운이 있을 때 미리미리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멸치볶음에 장조림까지 만들어서,
한번 먹을 분량이라도 냉동실에 얼려두면.
몹시 지치고 허기져서 집에 돌아온 쓸쓸한 저녁,
전자레인지에 살짝 데우는 것만으로 밥 한 상이 차려지는 마술을 부릴 수 있다네.
단, 빨리 간단하게 하는 요리가 대충 만드는 음식은 결코 아니다.
도마와 칼을 써서 재료는 먹기도 좋고 보기도 좋게 다듬고.
예쁜 그릇에 정갈하게 밥상 차리는 습관을 들이면,
언제든지 왕과 왕후의 밥상이 되어요!
아, 한 가지 더.
늘 부엌이 깨끗해야 부엌에 발 들이기가 쉬워진다.
밥을 해야 하는데 싱크대에 아까 먹은 설거지거리가 잔뜩 쌓여 있다면.
식탁 위에는 잡동사니가 널려있어서,
먼저 어질러진 상을 치우고 그릇과 조리도구들을 다 씻어야 요리를 시작할 수 있다면,
음식을 하기도 전에 심신이 지칠 것이다.
요리하자마자 조리도구를 씻고,
밥을 먹고는 곧 밥상을 치우며.
설거지를 마치면 얼른 그릇과 도구들 정리하기.
언제든 요리를 시작할 수 있도록
우리의 부엌은 깔끔하게 지켜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