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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들의 체육시간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by 이지혜


며칠 전 아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물어왔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이것을 주제로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에요.

헌데 생각해보니 저도 기사 정도로만 접했지 본격적인 페미니즘에 대한 책 한 권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먼저 청소년을 위한 페미니즘 책을 검색해 보고 며칠 뒤 잠실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러 찾았지만 제가 찾던 책은 없더군요. 그러다가 서가에 꽂힌 이 책을 사 왔습니다.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의 가정의학과 의사인 추혜인씨가 쓴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입니다.


책 내용에 앞서,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저는 일부 극렬한 메갈 활동을 하는 (페미를 자처하는) 이들이 그 안에 들어있다면 아니요 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저는 페미니즘이 어떠한 '~주의'로 불려야 하는 이 땅의 수준이 염려되고 동시에 누군가를 혐오하면서(일베 미러링을 하면서) 여성 권익을 주장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평화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아이에게도 엄마는 양성평등을 위한 페미니즘을 적극 옹호한다고 했지요. 성 대결로 치닫는 어느 한쪽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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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책 쓰신 분의 이력이 독특하신데, 아니 이분 삶의 방향성이 바로 읽히는 대목이기도 한데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했다가 성폭력 상담소에서 자원활동을 하다가 '성폭력 피해자의 입장에서 진료해줄 의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다시 같은 학교 의대에 진학하십니다.

피해자의 명백한 신체적 증거가 있어야 성폭력으로 인정되던 90년대만 하더라도 피해자의 입장에서 여러 상흔과 상처를 살피고 입증해줄 의료인조차 존재하기 않았다는 방증이겠지요.


또 책에도 실린 내용인데 남자가 가슴이 아프다고 하면 심장내과로 보내지고 여자가 가슴이 아프다 하면 정신과로 보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합니다. 남자 의사들이 여자 환자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연구결과가 실제 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 책을 절반 가량 읽었는데 모처럼 옛날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저자인 추혜인 선생님이 도수치료를 받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어깨가 구부정하다는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고등학생이 되어서 커지기 시작한 가슴이 싫었고 많은 여학생들이 체육 시간 전력을 다해 달리지 않는다는 글을 읽고 저는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저는 이 상황이 나만의 경험(정확히 우리 반의 경우라고만)이라고 줄곧 생각해왔기 때문이에요.

학교 체육선생님의 별명이 상당수 그렇듯 나의 고등학교 체육 선생님도 '미친 X'였습니다. (혹여 체육 선생님이 이 글을 읽으신다면 죄송합니다.) 그는 종종 여학생들의 팔 안쪽을 꼬집기도 했어요. 불혹을 넘긴 지금의 나이가 되어서야 알았지만 여성의 가슴살과 가장 비슷한 촉감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죠. 뭔가 수 틀린 것 같은 선생님의 감정 기복에 우리는 단체 기합도 많이 받았습니다. 때론 치마 교복을 입고 엎드려뻗쳐도 하고 말이죠.

체육 시간에 50미터, 100미터 달리기를 할 때면 우리 반 아이들 중 몇몇은 체육복 앞자락에 손을 넣고 달렸습니다.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왜냐면 이런 행동은 얼마나 어색한가요!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인지 그 광경을 보고 있는 나도 알았고 뛰고 있는 그 친구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상의 앞자락에 주먹 손을 넣어 가슴이 출렁대는 것을 조금이나마 막아보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뛰면서 출렁거리는 작든, 크든 신경 쓰이는 가슴의 존재가 싫었던 아이들. 그 심경을 충분히 알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뛰면 체육 선생님은 "야! 손 빼고 제대로 뛰어!"라고 소리 지르셨죠.

지금도 그 장면은 오늘 오후의 일처럼 생생하고 동시에 가슴 한구석에 처연하다 할지의 감정이 듭니다.

십 대의 여자 아이들은 왜 그래야 했을까요. 왜 신체의 변화를, 여성의 상징을 부끄러워하고 어깨를 펴지 못하고 다녔을까. 언제부터였을까. 구한말 사진을 보면 오히려 그때 한복 저고리 아래로 가슴이 다 드러나는 여인들의 자료 사진이 많았다고 하던데요.


생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초경을 또래에 비해 빨리 했습니다. 초등학생 때(국민학교군요,) 위스퍼(제 기억에는 이 회사가 맞을 겁니다.) 생리대 회사에서 예쁜 두 여직원이 와서 성교육을 실시했습니다. 남학생들은 쏙 빠지고 여학생들만 했는데 두 여직원이 들어오자마자 지금 생리 시작한 친구 있어요? 하고 물었을 때 내가 손을 들자 우리 반에 나 하나뿐이었어요. 성교육에 프로그램이라고 했지만 생리를 할 때는 자주 씻어야 한다는 둥의 허접한 정보와 함께 생리대 샘플을 나눠줬습니다. 문제는 그 시간이 끝난 뒤 다른 반 여자애가 나에게 와서 "너 생리한다며?" 하며 놀렸던 것과 그게 그제야 나로서는 부끄러웠던 것, 그리고 왜 나는 이걸 다른 애들보다 빨리 시작했지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요즘에야 딸이 초경을 하면 엄마, 아빠가 꽃다발도 주고 이만큼 자랐네 하며 축하해준다고 하던데. 나 때만 해도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생리하는 건 조용조용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해야 하며 '생리'라고 당당히 그 단어를 발음하는 일도 드물었다. '그날'이라고 다들 말했고 마치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면 내가 돌로 변하기라도 할 듯이 금기어처럼 귓속말로 말해야 합니다. 생리대 광고에서 빨간 피는 푸른 용액으로 둔갑해 흡수력을 보여주곤 했으니.


미국에 잠시 살았을 때 생리대 가격이 한국보다 훨씬 저렴해 놀랐어요. 비로소 한국 생리대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걸 알았죠. 인구의 절반인 여자가 폐경이 오기 전까지 가임기 동안 매달 구매해야 하는 생활필수품인데 생리대에 붙는 세금은 국가차원에서 왜 낮게 매겨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타국에 가서 직접 내 돈 주고 생리대를 샀을 때야 비로소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언젠가 친구에게 "만약에 남자가 생리했어봐. 아마 매달 정부에서 생리대 무상 지원했을 거야."라고 말했지만 친구의 눈흘김과 동시에 저는 '만약에 남자가'라는 전제는 얼토당토않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죠. 그러나 억울한 건 여전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90년대 후반 고등학생이었던 우리들과 달리 체육 시간에 전력으로 달렸으면 좋겠다. 생리를 생리라고 아무렇지 않게 남학생들 앞에서 발음했으면, 상체를 숙이면 교복 앞자락 속으로 가슴이 다 보인다고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여성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가슴이 그저 무릎이나 등처럼 어떤 섹슈얼함도 지니지 않는 신체 분위로 여길수 있기를, 때로는 모성이나 출산과도 상관없이 말이죠.(이것들을 부정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때론 섹슈얼리티가 빠진 하나의 신체로 중립적인 존재로 바라봐 줬음 해서 하는 말입니다.) 늘 그럴 순 없지만 그러한 대상으로만 백 프로 여겨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옭아매 왔던 가슴의 이미지에서 속박되지 않기를, 내 아들도 내 딸도 그렇게 키워야 할 엄마의 책무가 생긴 듯합니다.



책 중 일부를 옮겨보자면


대학에 입학한 후 페미니즘 모임에 나가, 나와 친구들은 가슴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가슴을 숨기고 싶어 했던 시기를 너나없이 보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랐다. 가슴을 숨기고 싶던 시간과 가슴이 크면 멍청해 보일 것 같았던 사춘기의 걱정이, 내 안에 자리 잡은 '여성 혐오'라는 걸 깨달았다. 여성 혐오는 남성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며 여자로 살면서 어릴 때부터 줄곧 느껴왔던 여러 경험과 생각들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음에 안도하고 슬프기도 했습니다.

내가 자라날 때보다 더 건강한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우리 아이들이 잘못된 인식과 관행을 답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어떤 누구도 함부로 여길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말이죠.


'어른'이 되려면 그래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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