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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우 김윤후 Oct 21. 2019

바람의 노래 (완결)

바람의 노래

대학로 소재의 대형 컴퍼니에서 제작하는 뮤지컬 최종 오디션을 보던 어느 날이었다. 두 명이서 극을 이끌어가는 이인극 뮤지컬이었기에 배우로서 욕심이 나는 작품이었다. 남자 배우는 나를 포함해서 두 명, 여자배우는 세 명이 최종 후보였다. 오디션 장소는 현재 공연을 하고 있는 극장이었다. 여자배우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나와 경쟁을 할 남자배우는 그의 공연을 몇 번이나 관람했을 정도로 나보다 경력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위축되었지만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객석 뒤쪽에는 심사의원들이 앉아 있었고 배우들은 앞줄에 앉아 자신의 순서를 기다렸다. 그리고 각자 호명된 순서에 따라 지정 연기를 마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 배우의 연기가 끝나자 심사의원 중 한 명이 배우들에게 말했다.

  "자유곡 한 곡씩 부탁드릴게요."

  최종 오디션은 연기만 준비해 오면 된다는 연락을 받아서 조금 놀랐지만 평소에 연습을 해 왔던 곡 중에서 작품에 어울릴 법한 노래를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먼저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나는 다시 무대에 올랐다. 사실 경쟁자를 이길 자신이 없었지만 후회 없이 오디션을 보고 싶었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음을 편하게 먹고 평소대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다른 남자배우가 무대에 올라 난처한 듯 말했다

  "지정 연기만 준비해 오라는 연락을 받아서 어제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그래서 목소리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말에 심사위원들은 그냥 편하게 부르라고 그를 안심시켰다. 그럼에도 그는 긴장한 듯 보였고 만족스럽게 노래를 부르지 못한 것 같았다. 평소에 술을 마시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운이 좋게도 합격 연락을 받았다. 배우를 하면서 처음으로 연습 페이를 받았다. 규모가 큰 회사여서 체제가 잘 잡혀 있는 듯했다. 배우들 프로필 사진도 전문 스튜디오에서 찍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 의상도 제공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연출과 음악감독님이 상당히 젊다는 점이었다. 나와 나이 차이도 크게 나지 않아서 즐겁게 연습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음악감독님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작곡가였다. 그녀가 음악감독 겸 작곡으로 참여한 뮤지컬을 관람한 뒤 진심으로 그녀를 존경하게 되었다. 예술이라는 것이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공연이 시작되면서 내 얼굴이 실린 팸플릿이 제작되고, 지하철역뿐만 아니라 대학로 여기저기에 포스터가 붙여졌다. 감회가 새로웠다. 처음 배우를 꿈꾸었을 무렵 상상했던 미래의 모습이 얼추 지금과 비슷했을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 첫 번째 시즌이 지나고 두 번째 시즌에는 전에 작품을 같이 했던 절친 배우 S가 여자 주인공으로 합류하였다. 힘들었던 시절, 좋은 무대에서 다시 만나자고 한 약속을 지키게 된 것이다. 함께 고생을 하던 친구와 무대에서 재회를 하게 되어 가슴이 뭉클했다. 많지는 않지만 공연을 보러 와주는 팬들도 점점 늘어났고 일본에서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도 생겼다. 덕분에 소식이 끊겼던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다.



연극 택시안에서2019(배우 간미연  김민호 황바울)

그러던 어느 날 공연을 같이 했던 선배 둘이 내 공연을 보러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과거 앙상블을 하던 시절과 달리 주인공이 되어 공연을 하는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서 너무 기뻤다. 날짜를 정하고 그들을 초대했다.

  공연 당일,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극장에 도착하여 몸을 풀고 노래 연습을 했다. 그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좋은 공연을 보여주고 싶었다. 관객 입장을 하기 조금 전에 두 선배가 배우 대기실로 찾아왔다. 나는 한 명 한 명 포옹을 하며 반갑게 둘을 맞았다. 선배들은 자기들 뒤에서 병사를 하던 내가 출세했다며 축하해주었다. 꽤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 한편으로 내가 주인공을 맡은 사실을 알고 공연을 보러 온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들은 못다 나눈 이야기는 공연이 끝난 후에 계속하자며 대기실을 나갔다. 나는 상대 배우인 S에게 특별한 손님이 왔으니 멋진 공연을 만들어 보자고 말했다. 그리고 신이 나서 그들과 있었던 일화들을 그녀에게 얘기하고 있는데 또 다른 절친 J에게서 전화가 왔다.

  "혹시 그 오빠들 너 공연 보러 왔어?"

  나는 놀라서 두 선배를 어떻게 아냐고 물었다. 내 질문에 답하지 않고 그녀는 어두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 사람들 다단계야."

  나는 멍하니 J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J는 그들이 자신의 주변 배우들에게도 다단계를 권하고 다녀서 소문이 파다하다는 것이었다. 우연히 다음 타깃이 나로 정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이 돼서 내게 연락한 거라고 했다. 처음에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지만 확인해보니 J가 말해준 다단계 회사 로고가 두 사람 모두 메신저 프로필에 등록되어 있었다. 그제야 나는 J의 말을 믿게 되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늘 공연 정말 잘해 보자."

  S에게 말하고 오프닝 멘트를 하기 위에 무대에 섰다. 많은 관객들 중에서 유난히 두 선배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주인공을 할 때 나는 그 뒤에서 앙상블을 하며 그들처럼 멋진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 꿈으로 긴 시간을 버텨왔다.   

  과거 동경했던 사람들이 내가 주인공인 공연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목적은 나를 다단계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눈물이 핑 돌았지만 꾹 참고 오프닝 멘트를 마무리 지었다. 소대기실에 들어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이인극이어서 쉴 틈이 별로 없었다. 공연을 하는 내내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럼에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결국 소대기실에 들어갈 때마다 참지 못하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전보영 배우 출연 '뮤지컬오늘을 기억해' 관람 후(개그맨 졸탄 배우 진세인 방보용 최수연)

 공연을 하는 동안 그들이 과거에 내게 해주었던 조언과 가르침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슬픔을 견딜 수가 없었다. 순간 S가 근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멋진 공연을 하자던 내가 집중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S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에게도 분명 소중한 공연일 테니까.  돈을 내고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평소보다 더 열심히 에너지를 써서 공연에 집중하였다. 다행히 관객들의 반응은 좋았고 커튼콜 때에도 기립박수를 받으며 공연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두 선배도 뿌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자 그들은 내가 멋진 배우가 됐다며 칭찬해 주었다. 그들의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져서 더 마음이 아팠다. 나는 정리를 한 후 넘어갈 테니 먼저 극장 근처에 있는 카페에 가 있으라고 했다. 그들은 좋은 공연을 보여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먼저 극장을 나갔다.

  S에게 사과를 하고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선배들을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며 걱정해 주었다. 극장을 나와서 잠시 고민했다. 과거 다단계에 빠졌던 후배를 구해줬던 것처럼 그들을 구해주고 싶었다. 그들과 보낸 시간 덕분에 내가 성장했으니까.

  극장 앞에서 J에게 다시 전화를 해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전화를 끊는 순간 내가 이순신 동상 앞에서 촬영을 할 때 J가 광화문까지 데려다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두 선배들 때문에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내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S와 J의 조언대로 그들과 만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선배 단원 중 한 명에게 갑자기 일이 생겨서 만나기 힘들다는 연락을 했다. 선배는 잠시만이라도 볼 수 없느냐고 했지만 냉정하게 거절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동경의 대상인 두 선배들이 미숙한 나에게 조언을 해주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배우로 산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중심을 잃으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렇지만 모두를 지킬 수는 없었다.

  '사라져 버린 그들의 몫까지 버텨내야지.'

  배우 인생에서 포기할 수 없는 이유를 하나 더 가슴에 새겼다. 그리고 진심으로 바랐다. 그들이 빛나던 자신의 자리로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일 년 동안 많은 것을 배우면서 두 시즌을 행복하게 공연했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은 덕분에 더 훌륭한 배우로서 관객들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꿈도 생겼다.

  시간이 흘러 모교 선배가 연출로 있는 작품에 참여하게 되었다. 작품의 작가 겸 배우이자 연출인 모교 선배는 훌륭한 예술인이었다. 대본을 읽는 순간 정말 잘 해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멀티역을 맡은 배우도 모교 선배였다. 배우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학교 동문과 함께 작품을 하는 목표도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정말 큰 동기 부여가 되고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그들과 함께 극장에서 밤늦게까지 무대 세트를 만들면서도 그 시간들이 너무 행복했다.

  "내 연봉은 50만 원이었어."

  "나는 배우를 하면서 핸드폰을 팔았는데 숫기가 없어서 몇 달 동한 한 대도 못 팔았었어."

  어느 날 술자리에서 두 선배가 자신들의 겪어온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 혼자 고생을 하면서 살아온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새벽 두 시가 넘었다. 그런데도 술집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얼핏 보니 낯이 익은 얼굴들이었다. 그때 한 테이블에서 누가 인사를 하러 왔다. 다른 작품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 후배 배우였다. 우리는 그를 반갑게 맞으며 연기에 대한 이야기와 배우 인생에 대한 애환을 나누었다. 나도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다른 작품을 하고 있는 배우들에게 인사를 했다.

  “끝까지 살아남아요!”

  우리는 서로에게 덕담을 해주었다. 덕분에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감정이 벅차올랐다.

  잠시 후 또 다른 모교 출신 선배가 술집으로 들어섰다. 그는 유명 연극제의 주연상을 받을 정도로 정극에서 유명한 배우였다. 함께 작품을 하는 두 모교 선배와 정극을 하는 선배 그리고 나는 잠시 밖으로 나갔다. 흡연자인 셋은 서로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나는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교 출신 배우들이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 대학로를 빛내고 있다는 게 뿌듯했다.

김상두 배우 출연 '뮤지컬 얼쑤' 공연 관람 후(배우 김주경, 이규인)

   “다들 고맙다.”

  정극을 하는 선배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처음 대학로에 왔을 때 너무 막막하고 힘들어 몇 번이나 배우를 포기하려고 했고 자살시도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꿈을 좇다 보니 인정을 받고 상도 받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학교 선배 관계를 떠나서 묵묵히 배우로서 버티고 있는 우리가 대견하다며 지금처럼 열심히 하자는 말을 하고 먼저 술집으로 들어갔다.

  두 선배는 1기 선배인 그가 얼굴과 다르게 오그라드는 소리를 잘한다며 낄낄댔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속으로는 진한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새벽 세 시가 넘어서야 나는 그들과 헤어졌다. 대로변으로 나왔지만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택시를 잡기 위해서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언제가 내가 쓴 작품을 공연으로 올려야지.'

  나도 선배처럼 글을 써서 공연으로 올린다면 배우들이 설 수 있는 곳이 더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걷는데 마로니에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이끌리듯 공원 안으로 걸어갔다. 늦은 시각이라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과거와는 달리 밝은 조명이 공원 전체를 빛내고 있었다. 그리운 마음에 무대에 올라가 보았다. 과거 연습실이 없어 공원에 있는 무대에서 홀로 연습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무대에 설 수 있다면 그저 좋던 그 시절, 함께 땀 흘리며 꿈을 꾸던 동지들, 함께 울고 웃으며 힘이 되어 준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나를 걱정하던 가족들. 그들 덕분에 버티면서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은 자신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무대 위에서 내려다본 마로니에 공원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콧노래를 불렀다. 내 노래가 공원 전체로 울려 퍼져나갔다.


 ' 이 노래가 바람에 실려 멀리 더 멀리 지구 반대편까지 퍼져 나가길 '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이게 나의 가는 길이요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내가 영광의 이 길을 진실로 따라가면

  죽음이 나를 덮쳐 와도 평화롭게 되리

  세상은 밝게 빛나리라

  이 한 몸 찢기고 상해도

  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

  가네

   저 별을 향하여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이룰 수 없는 꿈‘)    


  나는 꿈과 사랑이 담긴 이 노래가 온 인류에 전해지길 바라며 불렀다.

  사람들은 돈도 못 벌고 불안정한 삶을 사는 배우를 왜 하느냐고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연기란 돈키호테 데 라만차의 둘시네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냉혹한 현실은 풍차, 그리고 소중한 나의 친구들은 로시난테와 산초인 것처럼.

  이 글을 읽으며 꿈을 좇고 있는 당신들도 나와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누가 뭐래도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니까요. 힘든 일이 닥치고 좌절을 겪어도 우리 돈키호테들은 지칠 줄 모르고 달려갑니다. 가슴속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단단한 철학을 품고.

  

'오늘도 풍차를 향해 달려갑시다.'    




처음 브런치작가 합격 메일을 받고 기뻐했던 순간이 얼마 전 같은데 네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과거의 자신을 회상하면서 울고 웃으며 글을 썼던 것 같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갔다온 것 같은 기분입니다. 이런 기회를 준 브런치에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이제는 무대가 사무치게 그립다고 느껴집니다. 열심히 준비해서 무대 위에서 찾아 뵙겠습니다. 지금까지 제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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