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 8 - 무계획
여행사를 차렸습니다. 사업자 등록증도 없고, 축하 화환도 없습니다. 직원도, 사무실도 없는 유령 회사입니다.
엥? 이게 무슨 여행사냐고요?
진짜 사업자를 낸 건 아닙니다. 이번 여행 한정 팝업 여행사랄까요? (귀국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빛의 속도로 폐업했습니다.)
코로나 직전, 시누이 가족과 다녀온 것이 마지막 해외여행이었습니다. 그때 뱃속에 있던 그 집 막내가 어느덧 일곱 살이 되었습니다. 이제 좀 나갔다 와도 되지 않겠나 싶더군요. 그래서 외쳤습니다. “다 같이 여행 가자!” 문제는 그 말이 떨어진 후였습니다. 누구 하나 어디로 갈지, 언제 떠날지 입을 열지 않았거든요.
저를 포함해 모두가 극 대문자 P(즉흥형)인 상황. 아무도 계획 수립엔 관심이 없었습니다. 남편에게 슬쩍 물었습니다.
- 가서 뭐 하고 싶다거나 보고 싶은 거 있어?
- 음, 내려주는 데 내려서, 데려가 주는 데 구경하고, 먹으라는 거 먹으면 되는 거 아냐?
하하하하하. 전혀 도움이 안 되는군요.
비행시간이 긴 건 질색이라 가까운 일본, 그중에서도 따뜻한 오키나와를 낙점했습니다. 츄라우미 수족관 속 고래상어의 유영에 홀려 '여기다!' 싶었죠.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적극적인 의견 제시는커녕 "그래" 혹은, "오케이! 좋네"만 외치고 아무도 나서질 않으니, 이러다간 고래상어 은퇴식 때나 출발하겠다 싶었습니다.
참다못해 제가 여행사 깃발을 치켜들었습니다. 이름하여 하자투어. 네, 대기업의 이름을 살짝 빌려오긴 했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여행!>이라고 포장했지만 실제는 가이드가 좀 서툴고 실수해도 그러려니 하라는 뜻입니다.
지독한 귀차니즘을 뒤로하고 비행기 티켓부터 해치웠습니다.
다음은 숙소입니다. 대략적인 여행 계획이 나와야 숙소를 잡을 수 있겠더군요. 혼자 끙끙대다 머리가 지끈거려 결국 전문 업체에 외주를 맡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챗GPT대리님. 그(혹은 그녀)와 한바탕 회의를 벌인 끝에 3박 4일의 윤곽이 잡혔습니다. 그중 이틀은 다 함께 즐길 수 있는 독채 숙소로, 마지막 날은 따로 편안함을 느낄 호텔로 정했습니다.
숙소 예약 사이트에서 적당한 숙소를 발견했습니다. 마지막 하나 남았다는 문구가 깜빡깜빡하며 조급함을 키웁니다. '그래. 일단 결제하고, 식구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취소하지 뭐'라는 마음으로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결제 완료 화면 뒤로 ☆★예약 취소 불가★☆라는 문구가 번쩍이며 저를 비웃고 있더군요. 순간 식은땀이 싹 흐릅니다. 하자투어다운 출발입니다.
곧장 시누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취소 불가라는 사실은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하고, 기세 좋게 외쳤습니다.
- 우리 다 같이 묵을 수 있는 큰 숙소를 진짜 저렴하게 잡았어요!
수화기 너머로 잘했다, 고생했네 라는 칭찬이 쏟아집니다. 여행은 계획보다 기세입니다.
이 기세로 시누이에게 미션을 줬습니다.
일정표를 바탕으로 맛집을 알아오라고요. 오케이, 완벽합니다.
여행 당일이 되었습니다.
새벽부터 일어나 고양이 세수를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 사이 렌터카 이슈를 비롯, 세세한 문제들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저는 하자투어의 사장이니까 고객 만족만을 생각하며 극복했습니다. (P인간이 J인간인 척하려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공항에 들어서서 항공사 카운터 앞에 줄을 섭니다. 우리 앞에 줄을 서신 어르신들은 골프 여행을 가시나 봅니다. 하긴 따뜻한 곳이니 골프 치는 재미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무리에서 웅성웅성 소리가 들립니다.
- 아 진짜 큰일 났네 어쩌지?
- 어짜노. 지금 집에 누구 있나? 있으면 빨리 가지고 오라고 해라.
한 어르신께서 여권을 잘못 들고 오신 모양입니다. 말로만 듣던 상황을 실제로 목격하다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백번도 넘게 챙긴 가방 속 여권을 다시 한번 꺼내 확인해 봅니다.
로밍도 마쳤고, 주문한 면세품도 무사히 찾았습니다. 공항에서의 마지막 관문인 아침 식사까지 든든히 마치고 나니 그제야 안도감이 밀려왔습니다. 탑승구를 통과하는 순간, 비로소 진짜 떠난다는 실감이 나더군요.
비행기에 몸을 싣자마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잠이 쏟아졌습니다. 살풋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창밖으로 푸른 오키나와 바다가 보였습니다. 비행시간 짧은 게 최고입니다.
하지만 평화는 비행기를 내리기도 전에 깨졌습니다. 착륙하자마자 시누이가 카톡을 보냈거든요.
- 식당 일정 짜놓은 거 안 들고 옴 ㅠ
허허, 참내.
- 어떻게든 생각해내요!!
우당탕탕, 하자투어의 대책 없는 서막이 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