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선이 알고 싶다

하자 11 - 통제

by 하자윤



인생을 살며 우리는 무수한 선을 만납니다. 그것은 때로는 꼭 지켜야 하는 사회적 약속이 되고, 어떤 것은 지우개로 살짝 밀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그 경계를 슬그머니 넘어보기도 합니다.


여기,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지금, 화면 속 움직이는 작은 점 하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고정된 시선은 단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아이가 학원 건물로 들어갔는지, 평소 가던 길에서 1미터라도 벗어나지는 않는지. 눈은 마치 사냥감을 쫓는 추적자처럼 날카롭습니다.


조금 더 그녀의 곁으로 바짝 붙어봅니다. 그 옆에서 우리는 또 다른 선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위치 추적 앱에서 벗어난 그녀의 눈이 향한 곳. TV 화면을 메운 노란색 폴리스 라인입니다. 그녀는 왜 매일, 피 냄새 진동하는 범죄 수사물을 탐닉하며 스스로 불안의 늪으로 걸어 들어가는 걸까요?



사건은 평범한 저녁 식사 도중 발생했습니다. 온 가족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 그녀는 아들에게 가벼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늘 뭐 하고 놀았어?"

"기억이 안 나요."

직감했습니다.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것을요. 끈질긴 추궁 끝에 아들은 조심스레 입을 뗐습니다. 사실은 새로 사귄 친구 집에 갔노라고. 엄마가 남의 집에 갈 때는 미리 허락을 받으라고 했는데, 혼날까 봐 그랬다고 말입니다.

그 순간, 묵묵히 밥을 먹던 남편이 숟가락을 내려놓았습니다.

"왜 애한테 스스로 결정할 권한까지 뺏으려 그래?"

남편의 화에 그녀는 당혹스러웠습니다. 행선지를 밝히는 것은 보호자가 알아야 할 기본 정보이자, 아이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하교 후 제과점을 하는 친구네에서 빵을 얻어먹고도 말을 하지 않았던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친구엄마에게 고맙고 또 민망했던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어디 가는지 말하는 게 왜 권한을 뺏는 거야? 최소한 어디 있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

여인의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그녀에게 이것은 간섭이 아니라 보호였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눈에 비친 그녀는, 아이의 모든 행동반경에 촘촘한 그물을 쳐놓고 숨통을 조이는 감시자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녀는 왜 이토록 행선지와 보고라는 절차에 집착하게 된 걸까요? 정말 단순히 예의와 민망함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그녀만의 또 다른 이유가 숨겨져 있는 걸까요.


그녀가 이토록 아이의 동선에 집착하게 된 데에는, 차마 생각하기 조차 힘든 몇몇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폴리스 라인 너머의 죄 없는 어린 손들은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채널을 돌리면 그저 증발해 버리는 뉴스였지만, 갓 학부모가 된 그녀에게 그것은 실재하는 위협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일상 속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 서서히 그녀를 조여왔습니다.


결국 그녀는 스스로 만든 불안의 늪에서 범죄 수사물과 실제 사건들을 탐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자극적인 호기심이 아니라 필요해져 버린 현대판 생존 매뉴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알려줍니다. 가방 안에 호신용품을 챙겨 다니고 어디를 간다고 꼭 동선을 알리고,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은 절대 먹지 말라고.

‘아는 만큼 보인다, 아는 만큼 지킬 수 있다.’

그 처절한 믿음 아래, 매뉴얼은 아이가 넘지 말아야 할 안전선을 어디에 그어야 할지 가르쳐주는 정답지가 되었습니다.



다시 그 저녁 식탁입니다.

아이가 친구 집에 가며 허락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녀가 예민하게 반응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녀에게만큼은 행선지 미보고가 단순한 예의 문제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통제권 밖을 벗어나 해결 불가한 상황으로 가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불씨가 일어납니다.

"왜 애한테 스스로 결정할 권한까지 뺏으려 그래? 제발 세상을 아름답게 좀 봐."

남편의 날카로운 지적에 그녀는 당장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합니다.

자신의 보호를 남편은 구속이라 부르고, 그녀가 쌓아 올린 안전의 성벽을 남편은 아이의 감옥이라 정의합니다. 그녀가 그토록 지켜내려 하는 선은 무엇일까요. 아이를 정말로 안전하게 지킬 방어선일까요. 아니면 불안이 빚어낸 숨 막히는 경계선일까요.


사실 그녀 역시 갇힌 세계에서 자랐습니다. 그 선이 답답하고 견딜 수 없어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기도 했습니다.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을 때는 누구보다 기뻤습니다. 선을 어겨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내내 그 선을 단 한 번도 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지독한 관성이었습니다. 몸은 타국에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선이 발목을 단단히 붙잡아 매고 있었습니다. 선 밖으로 단 한 걸음도 발을 떼 본 적 없는 사람에게, 바깥세상은 해방이 아니라 거대한 불안 그 자체였던 셈입니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흐른 지금.

그토록 통제가 싫었던 그녀는, 이제 자신의 아이들 앞에 똑같은 잣대를 들고 서 있습니다. 자신이 겪었던 그 답답함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왜 그렇게 내려놓지 못하는 걸까요.

어쩌면 그녀가 아이에게 긋고 있는 그 선은, 아이를 지키기 위한 방어선이 아니라 선을 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엄마의 아집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넘지 못했으니 너도 넘어서는 안 된다는, 혹은 이 안이 가장 안전하다는 그릇된 확신 말입니다.


그녀는 아직 잘 모릅니다.

어디까지가 지켜내야 할 최소한의 선이고, 어디서부터가 아이를 위해 풀어주어야 할 자유의 영역인지 말입니다. 아이가 그 선 밖에서도 스스로를 지키며 자유롭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핸드폰 화면 속 점 하나에 울렁이는 불안감은 좀처럼 눌러지지 않습니다.

아이를 믿지 못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굳이 정의를 내린다면, 마주할 세상을 믿지 못하는 슬픈 불신입니다. 결국 그녀가 그토록 얻고 싶어 했던 것은 아이의 위치가 아니라, 선을 넘어도 안전하다는 확신일 겁니다.


오늘도 여인은 핸드폰 화면 속 작은 점을 응시합니다. 그 점이 선을 넘지 않기를 주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선 밖으로 당당히 걸어 나가 엄마가 가보지 못한 드넓은 세상을 마음껏 누리기를 모순적이게도 바랍니다.

불안과 사랑, 그리고 통제라는 이름의 이 모호한 경계 위에서 여인은 이제, 선을 조금씩 넓혀보고 있습니다.


엄마의 불안이 조금씩 작아지는 만큼, 아이의 세상은 그만큼 더 넓어지고 있습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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