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 10 - 기대
스스로 큰 행운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매 번 인생 한방을 외치며 로또를 삽니다. 제일 크게 걸려본 건 5만 원. 동료들에게 커피 한 잔씩 돌리고 나니 행운의 값은 다 써버렸지만 그만큼 행복을 얻었습니다.
비록 큰 행운은 없지만 소소한 행운은 자주 내 주위를 맴돕니다. 중학교 시절 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서 가수 사인 CD를 준다기에 그냥 “CD 주세요.”하고 주소를 남겼더니 덜컥 당첨되었던 적도 있고, 경품 행사에서 누가 버리고 간 추첨권을 주웠는데 전기밥솥이 내 손에 들어와 얼결에 효녀 노릇을 한 기억도 있습니다.
은행 면접을 볼 때도 그랬습니다. 2차 면접은 전략부장님과 인사부장님의 심층 면접이었는데 세 명씩 들어가도록 되어있었습니다. 나의 경쟁자들 중 한 명은 인턴생활을 잘해서 고객의 소리에 칭찬 글이 올라간 적도 있는 유명한 사람이었고, 다른 한 명은 키도 크고 예쁜 데다 야무져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졸지에 가운데 끼어버린 나는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할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ATM 기계에 손님이 출금해 놓고 잊고 간 돈이 있는데, 다음 손님이 가져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첫 번째 면접자가 말합니다.
A - 저는 우선 책임자와 함께 CCTV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후 고객님에게 연락해서 돌려받도록 할 것입니다.
분위기를 살펴보니 원하는 대답이 아닌 듯합니다. 이제 내 차례입니다.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 파바박 튑니다.
나 - 돈을 가져간 고객님도 결국 우리 고객입니다. 가져가신 행위는 잘못되었지만, 그분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착오가 있으셨던 것 같다’고 예우해 드리며 자연스럽게 돌려받도록 하겠습니다.
당시에는 고객 만족이 최우선시되던 시절이라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반대편에서 “그게 정답이다!”라는 말이 돌아옵니다.
이거 영 마지막 면접자가 부담스러워졌습니다.
C - 저도 옆 지원자 분의 말에 동의합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냐고요? 셋 다 합격해서 동기가 되었습니다. 만약 전문적인 금융에 대한 질문을 했거나 시대가 원하는 것이 고객만족이 아닌 철저한 원칙 중심이었다면 합격은 물 건너갔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시대를 잘 타고났습니다.
은행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다니던 때에 항공사에 지원한 친구와 둘이서 도피하는 마음으로 집 앞 편의점에서 맥주를 자주 마셨습니다. (면접날=만나는 날) 이렇게 말하면 술을 잘 마신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맥주 500cc가 정량입니다. 기다리는 그 순간들이 왜 그렇게 긴장되고 떨리던지. 살면서 처음 그렇게까지 간절했던 것 같습니다. 지나가다가 은행 간판 보고도 합격시켜 달라 빌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요.
그런데 요 근래 잊고 있던 그 감정을 느꼈습니다. 공모전에 첫 출품을 했거든요. '에이 안되면 뭐 어때' 하는 심정으로 냈으나 기대하는 마음이 단도리 되질 않아 홈페이지에 자꾸 로그인을 해보고 제출한 글을 다시 읽어보고 했습니다. 그 모습이 은행 간판을 보고 빌던 그때와 꼭 닮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오늘 아침에는 초연해졌습니다. “그래, 나 같은 초짜가 무슨.” 꼭 밀당하는 연애초보자의 느낌입니다. 늑장을 부리다 필라테스 수업 시작 시간이 다 되어서야 현관 앞에 섰습니다. 전화가 옵니다. 02로 시작하는 번호는 원래 그냥 스킵하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받아봅니다.
“축하합니다. 좋은 생각 생활문예대상 장려상에 선정되셨습니다.”
너무 신나 당장 남편에게 전화를 해 자랑을 했습니다. "상금이 10만 원이래!!" 필라테스는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없었습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내가 상은 무슨 상이냐며 쿨한 척 굴었던 얄팍한 방어막이 사르르 녹아내렸습니다. 사실은 좀 괴로웠습니다. 실망하기 싫어 미리 포기하는 척하는 비겁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받고 싶은 욕심 사이에서 말입니다.
이번에도 내 운빨이 통했나 봅니다. 만약 심사위원이 원칙과 기교를 중요시하는 분이었다면, 혹은 내 글의 하자를 크게 보는 분이었다면 이 전화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번에도 시대가, 혹은 누군가의 취향이 운 좋게 내 진심과 같은 방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챙겼던 운동 가방을 도로 내려놓습니다. 오늘 수업은 빼먹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지금 운동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급하게 노트북을 펼쳐 이 글을 씁니다. 어쩌다 얻어걸린 이 행운이 달아나기 전에 부지런히 다음 행운을 마중 나가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