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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녕 쌩글삶글 Feb 08. 2019

북경이야기로 만리장성 넘고자
“내역사는 내가 써간다”

– 김현숙 대한민국 한지부조공예 명인 제1호

작년(2016년) 11월 11일, 그동안 논산에서 각종 미술활동과 사회활동에 주력해오던 김현숙 씨가 “대한민국 한지부조공예명인”이 되었다. 재단법인 종이문화재단이 대한민국 한지부조공예 부문에서 제1호로 수여한 명인이었다. 


명인(名人) 칭호는 바둑계의 전문용어처럼 들린다. 그러나 부문별로 명인이 있고, 그 동안 한지부조공예 부문에서는 하나뿐이었다. 한지를 꼬아서 만드는 지승공예명인에 이어, 한지부조부문에서도 명인이 탄생한 것이다. 


명인 공천은 엄정할 수밖에 없다. 우선, 한 분야에서 20년 이상의 경력이 있어야 한다. 전공 분야의 논문이 있어야 하고, 포상관계 즉 국내외 전시와 수상경력이 심사 대상이다. 언론에 초청되어 해당분야를 홍보한 경력도 인정을 받아야 하며, 해당 분야의 후진 양성, 자원봉사활동 경력 등 사회봉사기여도도 주요 심사 대상이다. 이들 중 어느 하나라도 미흡하면 통과할 수가 없다. 달인이나 장인 등과는 차원이 다른, 다방면의 심사이다. 이런 관문을 모두 통과하여 배출된 명인은, 그래서 “대한민국 명인”이다. 



명인 따라서 한지스탠드 만드는 친구들


김현숙 명인과의 인터뷰는 광석면 이사리에 있는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기쁨두배 공예체험학습장’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작업장이자 전시장이다. 기자가 찾은 날은 마침 친구들 모임날이었다. 노르웨이 대사 남편을 따라 해외 생활하던 친구가 귀국하기도 하여서 간만에 원근 각지에서 모였다는데, 명인 친구의 제안에 따라 오늘 하루는 규방 공예인을 자처하는 자리였다. 스탠드용 한지 부조 작업중이었고, 작업 시간을 물어보니 8시간은 족히 걸릴 거라고들 하였다. 손으로는 섬세한 작업들을 하면서, 입으로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친구야, 아니 명인님! 한지 공예는 어떻게 해서 하게 된 거예요?”


- 내가 84년에 미술학원을 차려서 무자게 잘 됐어. 내가 마흔이 되던 96년 당시에도 원생이 180명이었는데, 친구가 불쑥 그러더라구. ‘애들이나 엄마들이 너를 아직까지는 좋아하지만, 할머니 선생님은 안 좋아라 하게 될거야.’ 이 얘기를 듣다가 고심을 하게 되었지. 당시 나는 논산 YWCA 전신인 논산여성인력개발센터 부위원장을 하고 있었어. 어느날 ‘직종 설명회’가 열렸는데, 거기에서 한길순선생님의 한지부조 작품 ‘어우동’을 접하게 된 거야. 회화와 결합된 한지그림을 보고서는 ‘그래, 앞으로 내가 갈 길은 바로 저거야!’ 하게 되었지. 한지부조 기술을 전수받으러 대전 법동까지 대중교통을 갈아타가며 다녔어. 매주 한 번씩, 전부 다섯 번을 공부하러 갔지. 배운 건 그게 전부였지만, 기초는 배웠기에 나머지는 나 스스로 독학의 길을 걸어왔구...” 


“그럼, 학원은 어떻게 하구서?”

- 한창 잘 나가는 학원였기에 주변에서 사람들이 비싸게 넘기라 하더라구. ‘아동미술학원’였는데, 내가 결혼 후 얼마 안돼서 문을 연 이 학원 이름 ‘아동미술’은 일반명사 같지? 그치만 당시에는 성인미술만 있었고, 아동미술이란 영역이나 이름은 없었어. 내가 1987년에 홍익대미술교육원의 아동미술전문가과정을 2기로 수료했는데, 아동미술이 들어간 명칭도 그때 나온 거였지. 여하튼 난 아동(兒童)이 좋았고, 꿈을 키워가는 사람은 모두 아동이라고 보았어. 그 아동들을 모두 졸업시키고, 내 20여년 청춘을 함께 한 간판은 떼어다가 지금도 집 창고에 고이 모셔두고 있단다.”



동양3국의 한지공예 비교해보니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기초 지식부터 물어보았다. 


한지 부조란?

“사방에서 볼 수 있는 환조에 비해, 부조는 한쪽만 도드라져 나오게 하는 조소 분야예요. 깊이에 따라서 다시 고부조, 중부조, 저부조로 나누어요. 나 같은 경우는 중부조로 작업하는데, 일본에서 저부조로 만든 카드와 휴대전화 줄을 보았죠.”


한지공예라는 말은 익숙합니다만....

“종이로 하는 공예를 통칭하여 지공예(紙工藝)라고 해요. 종이 중에는 서양종이도 많지만, 동양 종이는 나라마다 이름이 달라요. 중국은 채륜이 집대성하여 종이를 먼저 만들었다고 해서 선지(先紙), 일본에서는 화지(花紙)라고 부르거든요.” 


종이 선진국인 중국의 선지와 공예는?

“중국에서는 선지를 개인이 만들 수가 없어요. 국가에서 직접 생산하는 시스템이죠. 중국에 선지를 만들고 실용화, 예술화하는 전문 대학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한지공예 전수 제안을 받기도 했어요. 종이종주국인 중국에서 하게 될 일은 두 가지, 강의와 아울러 한지부조공예작품을 선보이는 일이죠. 요즘 싸드배치로 인하여 한중 관계가 불편해진 상황이지만, 예술은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다고 보아서 작품활동만큼은 꾸준히 해나가고 있어요. ‘북경이야기’ 우리도 예전 풍습이 사라져가면서 그 풍광들이 사진첩이나 미술품으로만 남는데, 중국 역시 대동소이하죠. 10년 전에 구입한 중국 북경의 풍속을 그린 수채화를 토대로 삼아서, 그 내용을 한지부조로 재현해내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어요. 나의 분신들로 하여금 새로운 한류를 일으키고, 만리장성을 넘게 하자는 일념하에 정진하고 있답니다.”


한지부조 공예는 일본에서 시작되었나요?

“상여에 꽂혀 있는 꼭두는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메신저입니다. 조선말과 일제초에 성행했던 인형인데, 아직 자료가 미흡하여 학술적인 연구과제가 아닌가 싶어요. 국내 꼭두로는 나무나 도자기 형태로 남아 있어요. 우연히 부여 백제원에 갔는데, 삼베나 종이인형도 있더라구요. 제가 작업하고 있는 한지부조공예 형태의 꼭두이어서 반갑기 그지 없었죠! 관련된 학술분야를 찾으면서 그 부문에 관한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전통공예라는 사실이 입증되어 있어야만 무형문화재로 등록할 수가 있죠. 


일본은  손인두로 지져서 주름이 없는 데 비해 나는 질감을 중시하여서, 입체감을 도드라지게 하는 편이죠. 이런 면에서도 일본 부조와 확실한 선을 긋고 싶어요. 일본 동경에서 한일문화콘텐츠 교류전 ‘꽃이 피다’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어요. 백제 문화에서 보다시피, 문화는 우리가 앞섰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고 봐요. 요즘 4차산업이 화두인데, 그 핵심은 융합과 스토리라고 봐요. 나는 작품을 할 때 괜찮다 싶은 시도는 어떤 것이든 다 해보려 해요. 북경 이야기에서도 그렇지만, 어느 작품에서나 스토리를 염두에 두고 있답니다.”


동양 3국을 비교해 보았는데, 한지공예의 세계적인 흐름은 어떠한지요?

“2004년 미국샌디애고 미해병대사령관 초청전을 시작으로 2006프랑스국제박람회, 2009 미국LA명품공예전, 2014 주 노르웨이 한국대사관 초청 개인전을 해왔어요. 언론으로 본다면, 워싱턴TV방송 ‘한국문화예술축전’에도 초청받았으며 헤럴드미디어 주관의 ‘2007헤럴드전통문화예술대전’에서 입상해 그것이 세계 곳곳에 소개되기도 하였어요. 유수한 매스콤의 위력을 실감했지만, 내실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국공예ㆍ디자인문화진흥원에서 주관하는 ‘공예경영지원사업’에 2차례 선정, ‘한지상품 개발 디자인 토너먼트 워크샵’에 초청되어 ‘한지의 세계화에 대한 생각’을 발표했어요.”



한지의 실용화를 위하여

 

이야기가 세계화쪽으로 번져나가, 다시 작은 얘기로 돌아왔다. 


한지, 한식, 한복의 세계화를 제창해 나가고 한류와 함께 선풍적 인기이기도 하지만, 정작 본토 한국에서의 경시 풍조나 몰이해 상황에 대하여서는요?


“한지는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봐요. 아이가 태어나면 사립문에 새끼줄을 늘어뜨린 다음 한지를 끼워넣었고.... 죽어서는 지방을 써왔잖아요! 문제는 실용성과의 결합이라고 봐요. 지금 우리가 만들고 있는 한지스탠드는, 그 은은함이 절로 느껴지지 않나요? 자크를 달아서 밝기를 조종하면 분위기도 사뭇 달라지고요.”    

2층 전시실을 안내하던 김 명인은 갑자기 뭘 하나 팽개친다. “세라믹으로 된 찻잔 받침이 실용적이겠지만, 한지로 만든 다음에 마감을 하면 물이 배이지 않을 뿐 아니라 넉넉한 질감에 가벼워요. 사는 데 이런 정도의 멋은 누려야지 않겠어요?^”


계단에 걸려 있는 줌치 한복은 드라이 세탁으로 관리가 가능하다고 설명해준다. 한지로 만든 놀이개 악세사리는 그 질감이 보는 이의 마음까지 푸근하게 해준다. 전주대학교에서 한지문화산업을 전공한 김 명인은 한지학회 회원, 전주한지문화축제 운영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지의 주 원료인 닥나무 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닥나무! 이름조차 생소한 삼지닥나무를 도침질하여 만든 종이는 비단결처럼 곱고 잠자리 날개 같아 ‘잠견지’라 부른다. 김 명인이 선물로 받은 잠견지와 거기에 쓰인 글자를 보여준다. 그토록 야들야들한 잠견지에 글씨를 써도 번짐이 없다? 이처럼 한지는 원료 자체부터 예술이라니.....



한지는 보는 것만으로도 멋스럽지만, 한지 공예는 어려워 보이는데요?

“중도에 포기하는 분도 많은 걸 보니 쉽지는 않죠. 전시회때 팔려나가는 작품도, 실은 환불이라도 하여서 되사고 싶어요. 그만큼 애정을 기울였고 힘들기도 했기에 내 새끼요 분신이죠. 

 그러나 이것은 전문가의 길이겠고요, 취미나 실용 차원에서는 즐길 수도 있어요. 2000년 당시에도 사회봉사는 있었지만, 문화 예술가의 재능 기부는 생소했던 때였죠. 상월에 정신요양원이 있는데, 이 정양원을 찾아갔더니만 어떤 환우는 처음에는 손도 내밀지 않다라구요. 아예 손도 씻지 않구 있었구(웃음). 매주 한번 서너 시간 섬긴다는 마음으로 갔는데, 어떤 때는 아침에 갔다가 밤 늦게 돌아오기도 했어요. 한지공예뿐 아니라 그냥 놀기도 하고 일반 미술도 하고.. 20여명, 그들이 나중에는 변하더라구요. 4월 장애인의 날 한마당잔치에 자기들이 직접 만든 한지 제품을 내다팔기도 했어요. 그런데 내 생일날, 약식도 준비해놓고 기다린다 해서 나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더이상 지속은 못했어요. 그 후 들려오는 소식이 희소식이더라구요. 이제는 동네에 나가서 제초봉사도 하고 일손 딸리는 데에는 나가서 용돈도 벌어오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는!”



교육의 기쁨과 일상화


교육의 힘은 살아 있는 모양이다. 김 명인은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미술대회에 나갔단다. 부창 6학년때 전국대회를 휩쓸어 소년조선일보에 대서 특필되었고, 중2때는 미술과외를 받은 게 아니라, 함께 살던 선생님의 자제 과외도 시켰다고 한다. 쌘뽈여고는 미술장학생이었고... 방통대 장학생, 전주대 성적우수장학생....이처럼 공부나 예술인은 타고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 명인의 생각은 달랐다. 화가는 태어나는 것이라기보다, 길러지는 것이라 믿었기에 미술학원을 차린 것이다.     


미술학원에서는, 대개 기교에 치중한다고 하던데요?

“우리 원생들이 신세계백화점 과천에서 시행하는 미술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어요. 전국 유치원 부문에서 30명 뽑는데 그 중에서 우리 아동미술학원생 17명이 상을 휩쓸었어요.” 


아이들이 그토록 선전한 데는 남다른 비결이 있을 거 같은데요.

“다양성이고 창의성이죠. 나는, 그걸 그대로 살려주는 일만 했어요. 당시에는 은행나무가 있던 논산오거리가 걸어서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거기에 매년 유치부 5반으로 구성된 “거리의 꼬마화가들” 거리전을 했고요, 11년이나 롱런을 했습니다. 가령 할아버지와 신발가게라는 동화에서 주제를 설정하면, 아이들은 운동화라는 주제 범위 내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펼치게 하는 형식이었죠. 획일적인 것은 최대한 배제하도록 했어요.”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애들을, 학원 문 닫은 다음 어떤 형태로 만났나요?

“애들을 워낙 좋아해서 동화구연도 해왔어요. 2013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급하는 문화예술교육사 자격증도 취득했고요. 학교에서는 공예 분야의 예술강사로서 교육에 참여해왔어요. 학부모님들이 세미나 참석차 오실 때 한지공예 체험도 해서 작품을 집으로 가져가시게 해왔죠. 문화원에는 어르신문화학교가 있는데, 2009년부터 한지공예를 해왔어요. 거기서 배출된 다섯분은 지금도 저와 함께 해요. 각종 교육에 보조교사로 참여하면서 기술도 전수하고요, 월요일마다는 논산 시청 뒤에 있는 “기쁨 두배”에서 동아리활동을 계속해 나가고 있어요.”


공식적인 교육을 정리해보면, 김 명인은 2008년 대한민국 우수 공예품 생산업체로 인정받아 한국공예협동조합연합회로부터 ‘공예현장체험 학습장’ 적격업체 지정을 받았다. 주민자치센터, 여성인력개발센터, 논산문화원 어르신 문화학교, 방과 후 학교 및 학교예술 교육에서 8년째 충남문화재단 소속의 공예 예술 강사로 활동중이다.


요즘 방과후 지도나 지역민과 함께 하는 문화교실에서 강사들의 역할이 증대한 거 같은데요...?

“최순실 사건의 여파인지, 아직도 2017 예술강사 학교 미배치 상태예요. 대기중인 강사님들에게도 봄은 왔건만 예전처럼 바쁘지가 않네요. 나같은 경우, 강사료보다는 교육 자체가 훨 중요해요. 누군가 만나서 무엇을 가르쳐주고 나누는 것보다 뿌듯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김 명인은, 결혼 후 지금까지 애들 키우고 시아버지 어머니 병 수발 다 들다 보니 분초를 다투며 살아온 삶이었단다. 그런 와중에서도 학생들에 대한 교육만큼은 소홀히 해본 적이 없는데, 강사료가 많이 차이가 나도, 심지어 무료 교육이라고 해도 교육열에서 차별심이 일어나지 않는단다. 


“일주일에 닷새는 일하고, 하루는 재능기부, 하루는 학생부담당 교사일로 정해놓고 살아요. 충남지방회에서 수여하는 선데이스쿨 교사 20년 봉직자에게 주는 모범상을 받았는데, 그 상은 어떤 상보다도 자랑스럽답니다.”


‘기쁨 두배’라는 상호는 신앙심의 발로인가요?

“내가 작품을 만들어서 팔게 될 때가 있잖아요. 나는 만들어서 기쁘고요, 사가는 이는 마음에 들어서 만족스럽게 되니 기쁨은 저절로 두 배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논산에서의 기쁨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2001년부터 논산시 취암동에 ‘기쁨두배쇼핑몰’을 열고 한지공예 무료수강 및 재능기부로  본격적인 한지작품 활동을 시작했어요. 2002년 논산시공예품 경진대회에 첫 출품해 ‘은상’을 받았고, 2004년도에는 전국대회에서 총 10개의 수상 기록을 세우기도 했어요. 현재까지 각종 대회에서 40여 차례 수상하였으며, 지자체로부터 가치를 인정받아 10년 넘게 지원을 받아왔습니다.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 감각에 맞춘 디자인 개발에 머리를 써봤어요. 강경젓갈축제, 딸기 축제 등의 캐릭터 50여종을 개발하고 다양한 한지공예상품을 제작해 보았어요. 충남문화산업진흥원의 ‘2012문화콘텐츠 브랜드 육성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브랜드ㆍ로고ㆍ패키지 등을 제작한 실적 등등이 지역사회에서의 기쁨이요 보람으로 남네요^ 하지만 요즘은 제작보다는, 작품 활동과 교육에 더 주력하려 해요!”


대화가 작품 세계에까지는 나가지 못했다. 시간 관계상 대화 인터뷰는 마치고 전시장 둘러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개척자의 기운이 느껴졌다. ‘막힐 때마다 뚫었다’는 어느 자서전 주인공처럼, 김 명인은 기로에 설 때마다 새 지평을 열어온 것이다, 창조를 예술 분야에만 적용시키는 게 아니라 실생활 곳곳에 적용시키면서...


[글·사진] 이지녕  

이 글은  2017-03-22일자 『놀뫼신문』에 실은 내용입니다. 

https://nmn.ff.or.kr/23/?idx=514338&bmod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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