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길인생 조각해온 ㈜연미석재 이수희 대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원어로는 ‘예술’이라기보다 ‘기술’이라고 한다. 논산에는 기술과 예술의 벽을 넘나드는 명인들이 있다. 이번에는 석공예 명인 연미석재 이수희 명인을 만난다.
‘대리석 안의 낮잠 자는 천사를 깨워 그를 자유로이 해주려고 돌을 깎았다.’ 미켈란젤로의 말은 미려(美麗)하기 그지 없다. 그런데, 정작 돌을 깎는 과정까지도 아름다웠을까? 세계적인 명작들의 출산 기간은 어느 정도였을까? 벌꿀 10g 채취를 위해 꿀벌은 한 꽃을 60번 정도 들락날락.... 다른 꽃으로는 6만송이를 찾아다닌다니, 총 36만 번 찍어온 결과물이 벌꿀 한 수저이다.
석공들은 하루 몇 번 정도 정을 쪼을까? 30여 년 전 한 석공이 대전일보와 인터뷰를 했다. “수많은 망치질에서 정 끝으로 이어지는 수도승 같은 마음의 이음. 돌을 쪼며 바람에 휘날리는 돌가루를 마시며 돌과 10여년을 살아온 이수희(李壽熙) 씨(31세).『하루에 2만번 정도의 망치질을 합니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온 정신을 오직 손 끝에 쏟아야만 합니다. 조그만 잡념이라도 있으면 작품을 완성시킬 수 없습니다.』
하루 2만 번 돌을 때리는 동안, 그 반동으로 인한 골때림은, 골울림은 대체 몇 번이며, 여기에 완충제 같은 것은 존재하련가? 보통 사람들은 일정 기간 해보다가 이내 나가떨어질 거 같고, 설령 견뎌간다 해도 평생직은 못 될 거 같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이야기까지 해버렸다. “석수는 무엇보다도 건강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그는 『나이가 많은 석수는 거의 없습니다. 하루에 2만여 번의 망치질을 하고 거대한 돌을 옮길 정도의 체력이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이 일을 할 수 없어요.』”
그러던 그가 어느 새 환갑을 지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현역이고, 승승장구 상승곡선이다. 작년도 2016년에는 제5회 한국문화예술명인으로 인증받았다. 이보다 더 영예로운 대한민국우수숙련기술자로도 선정되면서, 노동부장관이 선정한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로 위촉되기에 이르렀다. 2016년에 3개의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함으로써 생애 최고의 환갑 선물을 받은 것이다.
45년에 걸친 그의 외길 인생은, 두툼한 대한민국 명장 신청서에 집약되어 있다. 도전으로 일관해온 일생이기에 결과물인 작품이나 수상경력 등이 화려하다. 거봉(巨峯) 앞에서 느껴지는 멀미를 피하고, 소소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았다.
“여기가 부적 외성리인데, 연산 대전 숱하게 오가는 동안 길가 전시장에 써 있는 姸美석재를 보게 됩니다. 그 정확한 뜻이 무엇인가요? 올해 환갑 맞은 배우 김보연 이름은 예쁠 연娟이던데, 연미의 연姸..... 일상에서 쓰는 한자는 아닌 거 같아요.”
→ 연미에서 뒷자 아름다울 미야 다들 아실 테고.... 앞자는 고울 연姸입니다. 예쁠 연娟의 친족어라 보시면 될 거 같아요. 부인 이름을 딴 거냐고 지레짐작하시는 분도 있는데, 처 조부께서 작명해주신 겁니다. 87년도에 대전에 개인사업자 낼 때 그 이름을 지어주셨어요. 여자 이름 같지만 부드럽고 섬세함을 요구하는 (석)공예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그대로 등록했죠.
석공예는 분수령이 있다. 처음에는 석공, 석수, 돌쟁이..... 그러다 보면 섬세함이 요구되는 석공예가의 반열로 진입한다. 어느덧 조각가가 돼 있는 것이다. 큰 바위 얼굴처럼 때로는 자신이 조각돼 있는지도 모르는 채~~ 연미라는 이름은 그런 함의(含意) 같다. 거친 돌쟁이의 세계에서, 3D 그 험로에서 이제는 사방을 둘러보며 미학의 세계에도 눈길을 돌리려는 분기점! 이제는 내 이름으로 개인 사업을 해도 되겠다는 자신이 섰을 때, 이제는 내 색깔의 명함을 내밀어도 되겠다는 도전장의 새 이름이 연미석재였던 것이다.
이수희! 이름마저 여자이름 같던 소년 수희는 서천에서 태어나 살다가, 서울 가면 돈 잘 벌고 잘 산다는 소문을 듣고 상경을 한다. 난전 돌공장에 들어간 그는 2년 동안 월급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한 채 기술 배우는 데에만 집중한다. 밥 먹여주고 잠재워만 주어도 감지덕지이던 시절이다. 군대를 다녀와서도 2년 여 서울에 더 머문다.
1979년 제대를 하고 보니 기계가 달라져 있다. 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와 있던 것이다. 일본에서 석등, 불상, 묘비석 등 불교석공예품 수출이 쇄도했던 1980년대이다. 일본은 인건비가 싼 한국으로 대량수출을 주문하면서, 그 발주량을 주문날짜까지 받기 위하여 오더장과 함께 현대화된 기계도 전수해준 것이다. 석등은 전통수공구로 뽀개다가 기계가 도입되니 딱딱 규격에 맞춰 절단되었다. 일제 핸드그라인더는 머리 좋은 한국인에 의하여 이내 국산화된다. 이화, 고려, 신안 다이아몬드도 앞다투어 국산기계를 내놓는다. 일본도 신났다. 인건비가 20~30배 싼 한국에서 ‘아비지’ 후예들이 빼어난 손놀림으로 재빨리 만들어서 배에다 선적해주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다.
이 호황기에 그는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대전으로 내려온다. 이제는 기술이 상당 수준 향상되어 있던지라 고급인력으로 일당 뛰기도 하고, 도급일도 한다. 회사를 차리기에 아직은 경제적 기반이 없던 터라, 국제석공예사에 입사 후 그 회사 이름으로 일감을 따서 동종 지우들에게 나누어주는 일도 병행한다. 지금으로 보면 제작노임 도급제 형식의 소·사장제인 셈인데, 당시 동료 10여명과 함께 불상 각종 조각품 등 일본 조각 시장 개척에 나선 것이다. 86년에는 함열 밑에 있는 황등에서 동업을 시작한다. 1년여 지나면서 동업자 홀로서기를 다 도왔다고 판단, 드디어 개인사업자를 낸 것이다. 1987년도 연미석재공예사의 탄생이다.
수출 호황과 함께 회사는 성장 일로였다. 일본으로 석불, 석탑, 석등 등 석제품 수출이 줄을 이었다. L/C 끊고 선적한 후 B/L 제출만 하면 즉시 결재가 되므로 수금은 걱정 없고, 생산만 차질 없이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1989년 ㈜연미석재로 전환, 법인으로 출발하면서 논산으로 공장을 옮겼다. 직원도 계속 뽑아 최고 많을 때는 40여 명에 달하였다. 그 결과 1992년에는 대통령상인 백만불 수출의탑을 수상한다.
그렇지만 이런 호시절이 마냥 지속된 것만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인건비가 올라가면서 일본바이어들은 눈길을 중국으로 돌린다. 기술 전수를 위해 자국 기술자들을 중국에 파견하기도 하고, 한국기술자도 파격 대우 제시로 스카웃 열풍이 분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92년도, 이수희 대표도 초청장을 받고 중국으로 1차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출장지가 중국의 5대 시장이 아니었고, 별 실속 없이 여행만 다녀온 격이 되고 말았다. 10년쯤 후 원자재 수입건으로 중국으로 2차 여행을 갔다. 자본, 기술, 판로 등이 탄탄해진 상황에서 5대 시장을 제대로 찾아가긴 갔지만, 초기에 시장을 개척하여 선점하지 못한 현실을 직시하였다. 실기(失機)한 아쉬움은 따르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지금까지 나름의 역할을 해왔으니 후회까지는 아니라고 술회한다.
어쨌거나 수출 호황기였던 당시 40여 명의 직원이 하루에 한 사람꼴로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와 월급 올려달라고 이구동성이었다. 다른 데서 월급 올려 준다고, 그런 제안을 받고 나서 상의하러 오는 것이었다. 이 대표는 초지일관 본인의 경영철학대로 대하였다. 지금까지 종업원였다가 이제는 경영자로 바뀌었어도, 열악했던 작업 환경에서 겪어야 했던 개구리적 시절 고생을 역지사지하면서 나름 노동자편에 서 있다는 동지의식이 그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렸다. 4대 보험과 퇴직금 등 기본 사항부터 확실히 챙겼다. “내가 석공일하면서 퇴직금 받아보기는 처음이다.”는 반응이 이어졌다고 한다. 퇴직금을 일시에 지불할 형편이 아니었지만, 나누어서라도 어떻게든 총액을 맞추어주어 왔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생겨난 에피소드다. 논산으로 사업체를 옮기면서 석공예 업체 사장단 모임에 나갔다. 술이 한 순배씩 돌면서 다른 석재 사장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당신 돈 얼마나 많은지 몰라도 이 바닥에서 3년 버티나 보자!” 이 악담을 역으로 맞받아치면서 서로 멱살 잡는 해프닝으로......
직원들을 책임지기 위하여 1994년 12월에는 건설업에도 뛰어든다. 1989년 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 공예품전문생산업체로 지정을 받았고 석공예기능사, 문화재석조각 자격증을 취득하였기에 가능했던 석공사전문건설업이다. 일본 수출은 하향곡선을 그었고 IMF때는 수출물량이 예전의 30% 정도로 급감했다. 이제 남은 직원은 십여 명뿐. 신입직원은 별로 없고 일이십년, 심지어는 30년이다. 창사멤버다 보니 한 식구로서 어떤 얘기라도 거침없이 하는 분위기다. “우리 사장님 초심을 잃은 거 같여요~” 장군이야 하는 볼멘 목소리가 나오면........ “내 보기에는 자네들이 그런 거 같여. 주5일제 실시하면서도 여전히 초과수당 지급하고 있지 않은가?”라면서 멍군으로 응수!
직원들이 가끔 가다 툭 던지는 투정은, 작업 현장에서 리얼하게 느껴졌다. 굉음(轟音) 분쇄기 3대 돌아가는 소리가 박지연의 열하일기에 뻥튀기한 자연음이 아니라, 거대한 돌공장의 파열음이다. 작업장 둘러보니 귀마개에 대한 안내문이 붙어 있다. 각자 자기 일에 전념하느라 얘기할 상황도 아니지만, 석공들 귀는 모두 닫혀 있었다. 작업장에 여자 한 사람이 있어서 잠시 의아해하다가, 다가가 말 붙여보려다 눈 인사만 마주친 다음, 속으로는 보조 시다인가 보다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1991년부터 근무해온 수연마기술사란다. 원형상태에서 대형연마는 큰 기계로 처리하지만, 최후 마무리 단계에서는 핸드그라인더로 광을 내는데, 그 연마기술사인 것이다.
짚신장사 아버지의 유언처럼, 석공예에서도 마지막 처리가 중요하다. 본지 지난 호 1면에 “연미석재 이수희 대표, 미얀마강제동원추모탑 세우고 오다”라는 제하의 기사를 게재하였다. 달포 후에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미얀마에서 추모탑 제막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이 작업을 대한민국 유수업체 중에서 연미석재가 맡게 된 이유는 단 하나, 정교한 기술력이었다. 재단측 공모에서 당선된 선진플러스는, 5미터 탑을 올릴 때 3등분된 연결 부위 매지 작업 등에서 결점 제로의 업체를 찾아내야 했다. 이수희 대표는 일본에도 출장을 자주 간다. 일본바이어들이 원가를 절감하기 위하여 수출 오더는 중국에 내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품질까지 담보되는 현실은 아닌 모양이다. 결국 마무리는 기술 좋은 한국기술자 불러다가 화룡점정 마무리를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다. 우수숙련신청서에 있는 <현장확인 때 시연할 숙련기술에 대한 내용 기술>이 이런 정황을 좀더 리얼하게 보여줄 거 같다.
“시연 내용은 석가여래부처님의 얼굴을 조각하는 과정입니다. 부처님의 본체는 좌상으로 규격은 높이 60~70㎝이며 원재료는 화강석입니다. 얼굴은 둥근형의 잔잔한 미소와 아름답고 부드러운 선, 자비로움의 모습으로 조각해야 하는 작업이며, 특히 눈과 입 모양의 조각은 부처님 얼굴 모습의 느낌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기술이라 생각합니다.”
이 작업도 명인 심사관 앞에서도 직접 시연하였다. 취재차 나온 기자 앞에서도 이 작업였는데, 시연이 아니라 실제 작업이다. 직원이 공 들여서 상당부분 완성해 놓은 불상을 한참 동안 뜯어본다. 이윽고 그의 손에 그라인더가 잡힌다. 뺨의 살부터 깎아내리더니 입술로 가서는 염화시중의 미소를 키우고, 날카로운 송곳이건만 눈빛은 온화해진다. 귀도 부드러운 너털귀로 탈바꿈이다. 하늘 향한 손가락 사이로 그라인드 소리가 거칠어지더니 일순 날리는 돌가루들이 완전 장풍이다.... 불모(佛母)는 옆구리로 출산한 마야부인이기도 하지만, 현대판 불모 후예들은 불심 가득 머금은 채 자신만의 옥동자를 출산한다. 거칠고 황량한 돌산 마굿간에서 석분가루가 마치 생명의 산소라도 되는 양 온몸으로 들이키면서 들숨날숨 산고를 치러내는 것이다.
‘이런 예술적 안목과 정성의 내공이 있기에, 중국 석공들이 만들어 놓은 불상의 표정 수정이 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렇다고 해서 100% 다 성형수술이 가능한 것은 아니란다. 손 대본들 별무신통인 것들에 대해서는 아예 손을 대지 않는다. 한·중·일의 차이가 엄존하는 현실이다. 불교문화가 한국에서 현해탄 넘어갔기에 원판불변의 법칙이나 한류 원류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일 불상도 대동소이하다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역사가 흐르면서 미세한 차이가 나타난다. 성격상 일본은 얍상하고 4.5kg 정도인데 비해 한국은 중후하고 무거운 분위기로 5kg 정도이다. 몸매로 들어가서, 8등신 미인은 안 맞고 일본은 7.5~7등신, 한국은 7~6.5 등신이 제격으로 어울린다. 석등의 경우도 일본은 6각과 4각인 반면 한국은 8각 아니면 4각이다. 일본에서의 대표적인 한국 연미석재의 작품은 동경에 있는 하꼬네 사찰 좌불 5m 부처상이다. 한국에서 조각한 것을 현장에 직접 가서 조립 시공한 것이다. 7m짜리로는 요꼬하마의 공원묘지 내 상징조형물 관세음상, 후지산 백의관음상 등이다. 이제는 통째 수출보다는 성형수술 등으로 전환되어서, 집계의 의미가 희석되었지만...... 부처상의 경우 일본 수출 호황기 당시 한 달 10여개, 지금까지 총 2천여 부처상을 탄생시킨 셈이다.
국내에는 2008년 연무읍 육군훈련소 정문 앞 광장에 설치된 6·25참전유공자국토수호충성탑이 가까이 있다. 불상은 흑석리에서 머잖은 벌곡 평촌리 구한사(求漢寺)가 대표적이다. 본체 7m의 부처상, 후불에는 중앙에 제석천과 좌우에 8부신장, 하단에 8상도, 좌우 벽체에 비천상과 용신, 좌대에는 8금강이 조각되어 있다. 전면 기단에 12지신상과 용신 총 12m의 부처상이 조성되어 있다. 배경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중량 3톤씩인 8부신장상을 부조처럼 배치하기 위해 특수앵커를 동원하는 등 구석기 장비부터 현대장비가 총동원된 이 공사는, 96년에 무사히 마쳤지만 1억2천여만원은 끝내 받지 못하였다.
이 대표는 79년 군대 제대 후 각종 인물상, 동물상등의 조각품 제작기술을 배우기 시작한다. 80년대 국제석공예사에 입사 후 회사의 고부가가치 제품을 제작하여 수출 품목의 다변화와 수출시장의 확대에 일익을 담당한다. 일본과 국내에서 조각기술을 인정받아 일본으로 직접 수출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자, 1987년 연미석공예사를 창업하여 일본으로 석조각품을 수출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조각인 것이다. 각종 조형물, 공예품, 전통석조각등을 제작하면서 공모전과 작품 전시회에도 도전하였다. 지금부터 10년 전인 2007년 석공예 지방기능경기대회를 시작으로 전국기능대회 3위 동메달을 땄다. 1994년 전문건설업 등록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2013년에는 조경시설물 등록, 2016년 직접생산증명 등 석재 분야의 공예품과 조각품의 설계에서 제작 시공까지 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해가면서 영업의 범위도 확장해간 것이다. 그 결과 작년 8월 26일,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2016년도 대한민국명장, 우수숙련기술자, 숙련기술전수자 및 숙련기술장려 모범사업체를 발표했는데 그 명단에 ㈜연미석재 이수희 대표가 당당히 들게 된 것이다.
현재 ㈔한국문화재기능인협회에 석조각 6870호로 등록되어 있는 이 대표의 예술가로서 캐리어는 석공예기술자로서의 삶과 엄밀 구분되지는 않는다. 2009년도에는 석공예기능사 자격을 취득했다. 2013년도에 문화재수리기능자 자격증(석조각공)을 취득했다. 그 결과 2015년부터는 문화재수리기능자 석공감독위원으로 일해왔다. 충남기능경기대회는 2009년도에 석공예 1위를 차지했고 2013~2014년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2016년에는 심사장을 역임하였다. 전국기능경기대회는 2012년도에 석공예 동상을 수상하였고, 심사위원은 2년 후에 맡았다.
예술적 조각가로서의 본격적인 행보는 2013년 충남미술대전입상에서 시작되었다. 매년 충남미술대전입상을 거치다가 2017년에는 대상을 수상하였다. 이대표는 ㈔한국석조각예술인협회 이사로서 현재 협회에서 시행중인 작품전시회 회원전을 공모전으로 변경시켜 나갈 구상도 피력한다. 올해 회원전은 웅천돌문화전시관에서 7월말까지 전시중이다. 2014년도에는 상을 두 가지 받았는데 울산 한글미술대전에서는 우수상, 한국문화재기능인작품전에서는 특별상이었다. 2015년도에는 대전광역시 미술대전 특선에 입상했다. 이러한 캐리어들이 집대성되어서 2016년에는 3관왕, 즉 한국문화예술명인, 대한민국우수숙련기술자,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 위촉되는 영예를 안는다.
이제는 <대한민국 명장>이 남았다. 대한민군 명인 명장 심사 기준은 다양하고 엄격하다. 기술은 기본이요 사업체 경영실적, 작업 환경, 봉사활동 등의 사회적 측면도 고려와 평가의 대상인 것이다. 대한민국명장으로 선정된다면 어떤 활동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까지 물어보았다. “충남기능동우회의 재능기부 봉사활동은 1박2일의 기간 동안 시행하며 마을 간판석 제작, 농기계수리, 이·미용 등 다양한 기능 소유자들이 함께 하고 있어요. ㈔한국문화재기능인협회의 재능기부 봉사활동은 충청남도에서 지정해준 문화재의 각 분야 보수와 주변 제초작업, 청소 등의 재능기부 봉사활동이죠. 주변에 연이 닿는 곳과 손을 잡고 함께 해나가요.”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사업단에서 시행하는 일 학습 병행제도와 저의 오랜 경험의 기술 등을 기존 후배 석공예인들의 기술을 향상시키는 조각기술과 가공기술을 전수해야 할 텐데요, 공예에 관심이 있는 젊은 청년과 학생들에게 석공예 체험교실을 운영해서 체험의 기회를 통한 석공예분야의 새로운 일자리 창출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
주고자 하나 받을 이 없는 게 현실이다. 석공예는 3D 기피 현상과 선입견으로 후계자 양성이 여의치 않다고 하소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볼 때 문화재 부문의 명인 명장들이 현장에서 조만간 은퇴하면서 생기게 될 급공배를 생각하면 오히려 석공예 세계가 무주공산 블루오션이 될 거라 전망한다. 인간문화재라고 하면 국악 판소리나 도예처럼 화려한 면만 부각시키거나 연상하기 십상이다. 석공의 정 자욱이 빚어내는 불멸의 예술혼은, 그 예술과 기술은 언제나 그 자리에 영원한데도 말이다.
[글/사진] 이지녕
이 글은 『놀뫼신문』 2017-07-26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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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가끔씩 만나는데, “밥 한 번 먹자” 인사 여전히 들어도... 아직껏ㅎㅎ